유병훈 계룡세계軍문화엑스포조직위원회 사무총장

고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오하라 가문의 장녀 ‘스칼렛’의 사랑과 고난, 역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지금도 주인공 ‘비비안 리’의 도도한 매력때문에 젊은 시절 필자 뿐만아니라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었던 기억이 새록하다.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역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영화 중 하나이며 고전영화의 백미(白眉)이기도 하다. 영화의 기억속에 전투 장면이 꽤 나오는데, 필자는 군대의 맨 앞에서 북과 피리 등을 연주하며 앞으로 전진하는 군악대의 모습을 보면서, 이채롭고 인상적으로 느꼈었다. 이는 군대의 선봉에서 부대의 사기를 높이고 전투의지를 고양시키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군악이란 말 그대로 군대에서 의식을 하거나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연주하는 음악이다.

군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6세기를 전후한 프랑스였다. 근세 취주악(吹奏樂) 성격을 가진 군악대는 17세기 중엽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명으로 작곡가 장바티스트 륄리가 창설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18세기 중엽, 군사력을 확장한 유럽 각국 이 군악대를 두게 되었고, 특히 터키 군악대에서는 처음으로 큰북과 심벌즈 등의 타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근대 국가 형성으로 군제가 정비되며 군악대 또한 체제와 악기 편성의 기준이 확립되어 군악대의 중요성이 커지고 위상도 그만큼 향상되었다. 악기 편성은 19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클라리넷의 도입, 동세기 중반에는 금관 악기의 구조적인 개선으로 구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한편, 영국은 1857년 군악학교를 설치했고, 이것이 발전하여 왕립군악학교가 되었다. 이후 취주악이 번성하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각 악대의 편성이 각각 달라 활동영역이 제한적이었다. 이를 위해 1921년 왕립 군악학교에서는 각 군의 군악대장 회의를 소집, 악대의 편성 표준안(案)을 만들었으며,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다. 20세기에는 밴드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며 수없이 많은 행진곡이 작곡됐다. 더욱이 군악대 및 취주악대 발전에 눈부신 활약과 업적을 남긴 존 필립 수자(John Philip Sousa)의 활동으로 미국 군악대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럼 우리나라의 군악은 어땠을까? 삼국시대부터 전쟁에 북과 징과 관악기를 사용한 것이 고분에 나타나 있지만 어느 정도 형식과 규모를 갖춘 군악대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였다. 특히 1682년(숙종 8년)에 금위영(禁衛營)내의 표하군(標下軍)에 취고(吹鼓) 109명과 세악수(細樂手) 25명이 소속되어 있어 북과 징이 주류였던 이전에 비해 대금, 피리, 해금, 적(笛)등 가락악기를 사용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후 1895년(동학혁명 이듬해)조정에서는 러시아식 나팔대를 설치하고 러시아 교관으로 하여금 훈련을 시키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곡호대(曲護隊)를 별기군(別技軍)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군악대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1900년에 조정에서는 군악대 설치에 관한 칙령 제59호를 공표하고 같은 해 12월 19일에 군악대는 일정한 조직을 갖추어 설치되었다. 그러나 한일병합으로 한국군의 해산과 더불어 더 이상 군악대를 둘 수 없게 되면서 해체되었다. 광복 後 육·해·공군 및 해병대가 창설되면서 각 군의 군악대도 속속 창단되었다. 창군 이래 많은 군악대가 창설과, 해체, 예속, 변경 및 개칭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늘 날에 이르러 국방부, 육군본부, 군사령부 등 총 50여 개의 군악대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군악의 정수를 맛볼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바로 "2022계룡세계軍문화엑스포"에서다. 오는 10월 7일부터 23까지 17일 동안 계룡대 활주로 일원에서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8~10개국의 해외군악대가 참여하여 규모나 내용면에서 기존 軍문화축제와 차별화된 국제행사로 치뤄지게 된다. 모름지기 깊어 가는 가을밤을 수놓을 군악의 향연에 취해보는 것도 나름 일상의 기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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