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산 전경. 충북 청주시 제공
우암산 전경. 충북 청주시 제공

[충청투데이 이심건 기자] 청주시의 동편에 위치하는 우암산(牛岩山)은 진산(鎭山)으로 시내의 중심을 관류하는 무심천과 함께 청주를 상징하는 산천으로 인식된다.

우암산은 높이 353m로 명암동·내덕동·우암동·수동·대성동·문화동·용암동에 걸쳐 있으며 정상을 중심으로 남과 북 3좌의 연봉과 중앙초등학교 동쪽의 당산(唐山)에 까지 이르고 있다.

우암산은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으로 가까이는 상령산(上嶺山)의 남서쪽으로 뻗은 산줄기인데 상령산과의 중간에 속칭 ‘바람매기고개’라 불리는 낮은 안부를 사이에 두고 있어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청주의 외곽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우암산이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청주 시민의 삶과 문화의 터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우암산은 침엽수와 활엽수로 혼합된 산림을 형성하고 있어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 시민의 등산로나 주말의 휴식공간으로 애호된다.

우암산은 본래 와우산(臥牛山)이라 불렸던 산이다.

와우산의 명칭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조선시대 지리지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등의 문헌기록에 나타나며 ‘우산(牛山)’이라 약칭되기도 했다.

와우산(臥牛山)이라는 산 이름은 산의 형상이 소가 누워 있는 모양에서 유래됐다는 속설이 일반적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소를 불교와 관련해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암산은 다른 명칭으로 당이산, 장암산, 대모산, 무암산 등의 기록이 보이고 이밖에 목암산, 목은산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암산이라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산의 서쪽에 있는 우암동이 본래 청주군 북주내면 외덕리였다가 1935년 청주읍에 편입돼 와우산과 용암사의 이름을 따서 우암동으로 개칭됐다.

이때부터 우암산으로 불려졌다는 설이 있으나 용암사가 창건된 것이 1945년으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소가 누워 있는 산의 모습과 바위가 많은 데서 우암산이란 지명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상당산성. 충북 청주시 제공
상당산성. 충북 청주시 제공

◆ 역사적 인물 및 사건

청주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정착한 사람들이 무심천(無心川)을 젖줄로 삼고 우암산을 울타리로 삼아 의지하면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삼국시대에 백제에 속했던 청주는 상당현(上黨縣)이라는 지명으로 문헌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우암산은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의 치지 또는 통일신명 때의 서원소경(西原小京)의 서원경성(西原京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또 우암산 주변지역에서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산 정상부와 능선을 감싸고 있는 산성이 남아있다.

이와 함께 곳곳에 현존 사찰과 옛 절터가 발견되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의 향교가 우암산 자락에 위치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한 신사(神社)가 세워지기도 했다.

우암산 기슭 곳곳에서는 민속신앙 행위가 지금도 끊임없이 전승돼 오고 있다.

문화유적을 토대로 우암산의 옛 모습을 보면 용담동에서 출토된 마제석기와 무문토기 산포지 유적은 이곳이 선사인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청주의 서쪽 구릉지대인 신봉동 일대에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고분들이 있는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백제 상당현의 치소로서 우암산은 매우 중요한 위치로 추정되며 현재 터만 남아 있는 우암산성의 축조시기가 통일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685)에 서원소경이 설치된 이후라 하더라도 그 이전부터 상당현의 치소가 우암산 안에 있었거나 우암산에 의지해 있었다고 예상된다.

우암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대략 신라 신문왕 9년(689)경으로 추정되고 고려 태조 2년(919)의 기록에 보이는 청주성과 동왕 13년(930)에 축조한 청주나성(淸州羅城)이 우암산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암산의 사방으로 통하는 계곡마다 거의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절터들이 있어 지금까지 대략 20여 곳의 절터가 확인 조사됐다. 또 조선시대에 지방마다 설치되었던 문묘(文廟) 즉 향교(鄕校), 사직단(社稷壇), 여단(厲壇), 성황당(城隍堂) 가운데 관아(官衙)를 중심으로 동쪽에 설치되는 문묘와 성황당이 관례에 따라 청주 고을의 동쪽인 우암산에 세워져 있었다.

용암사 석조비로사나불좌상. 충북 청주시 제공
용암사 석조비로사나불좌상. 충북 청주시 제공

◆ 문화유산

청주지역도 불교문화가 융성하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우암산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면서 산세가 좋고 방어적으로 유리해 시대의 흐름을 타고 많은 사찰이 들어섰으며 관련한 유물·유적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우암동의 청주대학교 구내 사범대학 건물 뒤에 용암사가 1945년 창건됐다. 이곳은 본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절터였다.

용암사 석조비로사나불좌상은 청주의 대표적인 석불로서 용암사의 대웅전과 산림집 사이에 남향해 노천에 모셔져 있었다.

용암사 주지의 이야기로는 1951년 우암산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당산의 동공원에서 옮겨온 것이라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불상은 본래 이 절터에 있다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가 원위치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용암사가 2008년 폐사하고 청주대학교에 부지를 매각해 불상은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우암산 서쪽 중턱의 청주 시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는 1943년에 세워졌지만 주변에서 많은 토기와 기와 파편이 출토되고 있어 옛 절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계향지사(桂香之寺)’, ‘월고사(月姑寺)’ 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들이 있다.

‘계향지사’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은 무심천 건너편 운천동의 흥덕사지에도 출토된 바가 있어 절터가 계향사 터인지 월고사 터인지 분명하지 않다.

관음사에서 주목되는 유물은 무쇠 가마솥 즉 철확(鐵鑊)이 있다.

가마솥은 1958년 발견돼 절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부식으로 심하게 파손되자 지금은 어디엔가 숨겨두었는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상당공원에서 동쪽으로 우암산 남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도로 동편에 절터가 있다.

현재 개인 주택이 들어서고 주변이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약 3300㎡ 정도에 이르는 절터는 조선후기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목우사의 옛터다.

목우사지 석조여래입상은 목우사지에 있던 불상인데 2002년 우암산 동쪽 기슭인 용담동 봉황사로 옮겨졌다.

목우사지 장대석. 충북 청주시 제공
목우사지 장대석. 충북 청주시 제공

◆ 설화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 선생이 보은으로 가는 길에 우암산에서 황소 기질 같은 산세를 발견한 후 단숨에 달려가 혈장을 찾아내어 그 곳에다 ‘차혈장군적합지포범인물야금묘’(이 묘자리는 장수에게 적합한 자리이니 보통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라는 푯말을 세웠다.

후에 상산에 사는 조풍수란 사람이 산을 타다가 이 혈자리를 발견하고는 명당 중의 명당자리를 얻은 것이 너무도 기뻐 푯말을 뽑아버리고 그 곳에 가묘를 쓰고 산을 내려오게 됐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리더니 안개가 시야를 가리며 황소울음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싯누런 황금 불을 켠 우두 장군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방금 전에 자신이 쓴 가묘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놀란 조풍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곳으로 가보니 가묘는 검게 불에 타 돌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가좌골은 우암산 남쪽 끝자락에 있는 마을로 ‘가재골’이라고도 한다.

‘가좌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神文王) 9년(689)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두고 성을 축조해 다시 있을 수 있는 북방의 내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후 81년 뒤인 혜공왕(惠恭王) 6년(770)에 왕이 서원경을 순행하게 됐는데, 왕이 순행한다는 전갈을 받은 성주는 왕을 맞을 준비를 해 놓고 왕의 행차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요로에 연락군을 파견했다.

혜공왕이 조항산성(鳥項山城)을 출발했다는 파발을 받은 지 하루 해가 넘어갈 무렵 성안에 횃불을 밝혀 놓고, 행차를 안내하던 의전관이 때마침 전갈군이 들이닥치자 “왕께서 지금 어디쯤에 계시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전갈군이 말하기를 “왕이 타신 연이 지금 큰 마을에 이르셨다”라고 했고, 이어 “왕의 가마가 작은 마을에 이르셨다”라고 알려졌다.

이에 비로소 성주가 의전군을 인솔하고 왕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달려가 서원경 성으로 안내하기에 이르렀고 왕의 가마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큰 마을을 ‘큰 가재골’, 작은 마을을 ‘작은 가재골’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그 후 ‘가재’가 ‘가좌’로 와전돼 ‘큰 가좌골’, ‘작은가좌골’로 불리게 됐다.

상당산성 남문. 충북 청주시 제공
상당산성 남문. 충북 청주시 제공

◆ 추천코스

1코스 : 삼일공원 - 우암산 - 우암산생태터널 - 상당산성 - 서문(미호문) - 동북 암문 - 동문(진동문) - 보화정(동장대) - 남문(공남문) - 상당산성남문공영주차장 (8.45km, 약 4시간)

2코스 : 청주랜드 앞 무료 주차장 - 등산로 - 우암산터널 - 우암산정상 - 우암산터널 - 도로 갓길 - 주차장 원점복귀(4.34km, 약 1시간 30분)

3코스 : 수암골전망대 주차장 - 팔봉제빵집 - 관음사 - 우암산 - 청주향교 - 3.1공원 - 원점회귀(7.3km, 약 3시간 30분)

이심건 기자 beotkkot@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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