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일 전 주아이보리코스트대사

2010년 어느 여름날인 걸로 기억되는데, 필자는 지평선까지 짙은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가득 찬 흑해 북서해안 지역을 따라 올라가 어느 고대 그리스 식민도시의 유적을 방문했다.

기원전 6-5세기경 유적지 돌무더기 속에 건져 올린 도자기 파편 위에 남겨진 상형의 무늬를 보며 트라키아(불가리아) 출신 바쿠스 신과 콜키스(조지아)로 향했던 이아손의 모험을 생각하다, 바로 근처 다뉴브강 델타 너머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항구, 영화사 불후의 명작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전함 포템킨’의 현장 그리고 그 영화 속 피의 학살 장면을 떠올렸다. 고대 전쟁은 영웅의 서사로 남지만 두 달 넘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는 어떻게 끝나 무얼 남길 것인지 자뭇 궁금해진다.

러시아가 전쟁을 벌인 동기가 제국의 부활을 꿈꾼 지정학적 거대 담론 때문이라면 상상 속의 나르시시즘이 깨어지는, 비용 대비 성과가 별무한 전쟁, 사실상 패배와 같은 제국의 조락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가 푸틴의 러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베어버린 알렉산더 대왕 시절과 달리 현대의 전쟁은 엄청난 전후처리의 청구서를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키이우 방어전에서 동부 돈바스 지역으로 전역의 중점이 바뀐 전황을 예측해 보면, 돈바스와 러시아가 2014년 병합한 크름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될 전선에서 양측 모두 상대를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하는 가운데 양측간 통제선(control line)으로 수렴될 전선을 따라 점차 적대행위가 소강상태로 접어 들어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전쟁 발발 이래 평화회담이 지속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정치·군사 문제가 타결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러시아 통제지역은 최종 해결이 난망한 채 존속하는 국제정치학상 용어로 ‘동결분쟁(frozen conflict)’ 지역으로 귀착될 것으로 본다. 동결분쟁 지역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불거진 나고르노-카라바흐, 남오세티아 및 압하지아, 트랜스니스트리아 지역 영토 분쟁이 전쟁으로도 해결되지 못한 채 있는 곳을 말한다. NATO 가입 추진에 대한 불만, 돈바스 지역 러시아계 소수민족의 보호 등 무슨 이유를 갖다 대도 무력침략을 명백히 금지한 유엔헌장 등 국제법상 러시아는 불법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러시아라는 국가 단위의 배상책임과 함께 침공을 자행한 정치·군사 지도자는 물론, 전투현장에서 민간인살상 금지와 같은 전쟁법규를 위반한 전투종사자 개인도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한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검사가 전쟁범죄 관련 조사에 착수했다고 하지만, 러시아가 ICC의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자의 신병을 인도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범혐의자 개인에 대한 처벌은 어려울 것이다. 한편, 푸틴 대통령과 올리가키로 불리는 측근 협력자 그룹이 미국 등 서방에 둔 자산이 범죄수익으로 간주되어 이미 압류되어 있다. 여기에다 러시아의 국가자산, 특히 침공 직후 동결된 서방 금융기관 예치 러시아 중앙은행의 자산을 더해 조성될 수 있는 상당 규모의 펀드가 전쟁 배상과 복구비용으로 사용될지 주목된다.

러시아는 당연히 전쟁 책임에 따른 처벌과 배상에 강력히 반발할 것인데, 특히 서방 측에서 자신과 자국민의 자산을 몰수해 배상금으로 사용하려는 경우 재차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결국 엄청난 인도·경제적 재앙을 야기한 전쟁을 수습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서방과 러시아간 또다른 대립은 피할 수 없으며, 향후 관계정상화는 서방이 요구하는 일정 수준의 전후 처리(배상 및 책임자 처벌) 없이는 어려울 것이라 본다면 포스트 푸틴 시대를 기다려야 할지 궁금하다. 푸틴의 러시아는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이고자 하지만, 무모한 전쟁으로 스포츠 이벤트로 말하면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이제 월드시리즈(?)는 미국·중국으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는 북한과 같이 국제적 보이콧의 안전판으로 중국에 의존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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