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한국전력 대전세종충남본부장

한국전력 대전세종충남본부 사옥 로비에 그림 한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관리와 사대부, 궁녀들이 입을 쩍 벌린 놀란 표정으로 환하게 밝힌 가로등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다. 제목은 시등도(始燈圖). 전기문명의 복음이 한반도에 최초로 도래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장소는 경복궁 內 건청궁이다. 경복궁은 다 알겠지만, 건청궁은 어디일까? 건청궁은 지금의 향원지와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사이에 위치했던 ‘궁궐내 궁궐’이었다. 고종께서 대원군 섭정을 벗어난 1873년 지어졌고, 1885년경부터 아관파천으로 거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1896년까지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됐다. 왕과 왕비의 침전 권역이었으니 최초의 전기설비 가설 장소로 낙점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건청궁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렸다가 2007년 복원됐다.

지금 경복궁에 가면 광화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주요 건물들 연장선의 북쪽 말단에 자리잡은 건청궁을 둘러볼 수 있다.

시등(始燈)의 정확한 날짜는 특정하기 어렵지만 1887년 3월 6일경이라는 설이 다수이다. 양력으로 따지자면 3월말 즈음이 된다.

당시 에디슨 전기회사는 경복궁 전등 시설을 동아시아에서 자사 전기제품을 판촉하기 위한 모델 플랜트로 시공했다고 한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8년만이자 동아시아 최초였으니, 고종께서는 상당한 얼리 어댑터였다.

개항 이후 조선 지식인 사회는 일체의 서양 문물을 배격해야 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와 동양의 윤리, 도덕, 지배질서는 유지한 채 서양의 과학기술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분열하고 반목했지만, 고종께서는 전기, 전화, 전차 등 서양 신문물, 즉 서기(西器)를 통한 부국강병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의 전력설비 운영은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 건청궁 궁녀들은 ‘너무 밝고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는 민원을 제기했고, 발전기 냉각수로 사용되던 향원지의 수온 상승으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고도 있었다. 전기품질도 좋지 않아 ‘도깨비불’, ‘건달불’로 불렸으며, 미국인 기술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운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발전에 소요되는 석탄과 외국인 기술자 인건비는 유림으로부터 왕가의 사치로 비추어져 상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태동한 우리나라 전력사업은 1898년, 서울의 전차와 전등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한성전기회사’ 설립을 계기로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전력사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금의 한국전력은 ‘한성전기회사’를 전신으로 해, 올해 창사 124주년을 맞았다. 국내에 몇 안되는 100년 기업인 셈이다.

건청궁에 최초의 전등을 밝혔던 130여년 전, 외국 회사의 턴키 방식을 통해 약 70kW용량의 발전설비를 도입했던 우리나라는, 현재 약 1억 3000만kW의 발전설비를 운영하고 있다.

해방 직후와 비교하면 600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2020년 기준 우리나라 발전량은 세계 9위다.

정전시간, 주파수 유지율, 송변전 손실율 등 전기 품질 또한 세계 최고 수준으로, ‘한국전력’은 우리나라가 식민지배와 전쟁의 상흔을 딛고 단기간에 세계 10대 경제강국이자 7대 무역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감히 자부하고 있다.

향후에도 연료비 급등에 따른 재무위기 극복, 작업 현장에서의 안전문화 정착,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최적의 전원믹스 탐색, 다원적 사회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고객서비스 개발, 전력설비를 둘러싼 갈등 해소 등 산적한 현안을 슬기롭게 극복해서 지난 124년 동안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국가경제 발전의 묵묵하고 듬직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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