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석 대전을지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한때 김난도 교수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주는 위로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꼰대’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 기성세대가 살아온 과거의 환경으로 2022년 청춘을 이해하는 것이 사실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청춘만 아픈 것이 아니다. ‘아프니까 중년이다’, ‘여전히 아프니 노년이다’를 외치고 있다. 청춘이 쏘아 올린 아픔 시리즈가 유행처럼 번져서 여기저기서 아픈 사람투성이가 되고, 너도나도 진심 어린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사실 가장 아프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세대는 노년이다. 노인 자살률은 세계 1위다. 중년은 또 어떤가?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은 세대가 50대이며, 갱년기가 되면서 염문도 모르는 아픔과 고통에 시달린다. 노년의 아픔, 중년의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 상처가 가장 아픈 것이고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엔 누구나 다 무감각하다.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안타까움을 TV로 보면서 우려와 위로를 보낸다. 하지만 채널을 돌리면 금세 잊어버린다. 타인의 고통은 하나의 영상, 즉 볼거리로 전락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하나의 뉴스거리로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고통 속에 우리가 모르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나왔으며, 철학과 의학의 비약적 발전이 있었다. 고통을 신이 내린 형벌로 보았던 시대도 있었지만, 근대의 니체는 고통을 창조의 원천이며 평균성을 뚫는 의지로 보기도 했다. 현재의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보는가? 타인의 고통은 힐링센터의 마케팅 재료이고 힐링토크의 주제가 되며, ‘용기 내요’와 같은 소셜 미디어의 댓글이 되면서 타인의 고통이 하나의 소비재로 쓰이고 있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지느는 ‘질병은 우리에게 어떤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했다.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실제로 병원에 가게 되면 모두가 철학자가 되고 의사가 된다. 건강에 자만했던 사람들도 겸손해지고, 음주나 흡연 등 나쁜 습관도 끊게 되며, 운동도 시작한다.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지?’부터 시작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까지 돌아보면 타인의 아픔까지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고통이 주는 선물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문제는 질병이 다 나았을 때다. 힐링에 취해 아팠던 기억은 없어지고 다시 자신만만해진다. 다시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가면서 질병을 달고 살게 된다. 여기가 인생의 분기점이다. 사실 질병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데, 니체는 이것을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권이라고 했다. 백세시대에 사는 우리는 언젠가는 아플 것이며, 또 언젠가는 즐거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프다고 힐링만 찾아갈 때, 아플 때 새롭게 보이는 것도 찾아보자. 이것이 100세를 건강하게 사는 힘이며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이고 니체가 말하는 창조의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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