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업성장지원부장

코로나 19 위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오미크론이 우세종으로 자리를 잡으며 코로나 확산 속도가 무섭게 빨라졌다. 잠시나마 기대했던 일상으로의 복귀도 이제는 기약이 없는 처지에 놓였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정부에서도 추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그들의 아픔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음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코로나 19 위기 속에서 상대적 빈곤감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대기업들은 전례없는 매출실적을 자랑한다. 대기업 직원들에게 수백 퍼센트의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중에는 당장 직원 월급을 구하지 못해 날 밤을 새우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심적 압박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 소녀가 처했던 모습과 판박이처럼 닮은 듯하다. 소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저녁에 눈이 내리는 춥고 어두운 거리에서 맨발로 성냥을 팔고 있다. 어둠이 깊어질 때까지 추운 거리를 돌아다녀 보지만 인적은 점점 줄어들고 성냥을 사주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대로 돌아가면 술주정뱅이에다 폭력이 일상인 아버지의 회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수많은 초를 밝혀놓고 난로 옆에 둘러 않아 거위요리를 즐기며 따뜻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데, 소녀가 기댈 장소라고는 건물 틈새 골목에 찬 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처마 밑뿐이다. 추운 곳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이미 손과 발은 꽁꽁 얼어 버렸다. 이제는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렵다.

그제야 자신의 앞치마 품에 팔려고 가져온 성냥이 눈에 들어왔다. 고심고심하다 성냥을 하나 꺼내 불을 밝힌다. 난로 같은 따스함! 하지만 이 따스함도 잠시. 불이 꺼지자 다시 자신만의 난로가 사라졌다. 다시 성냥개비를 하나 더 꺼내 보지만 따뜻함은 잠시 잠깐일 뿐이다. 그렇게 소녀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성냥 모두를 태우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할머니의 환영을 보며 할머니의 품에서 영원히 잠들고 만다.

필자는 이렇게 몇 번 성냥을 켜고 다시 꺼지는 순간을 반복하며 행복한 환영과 차가운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소녀를 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저당 잡혀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리고 어둠의 긴 터널 끝에서 행여나 사업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불태우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마저 든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흔히들 ‘위기는 기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기가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사업의 기회일지 모르나, 또 다른 어떤 이에게는 그저 절망의 계곡일 뿐이라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더군다나 절망의 시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길다면 이 말은 그저 기약 없는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다. 응원을 넘어서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도움은 희망의 끈을 그나마 붙잡고 있을 때 이루어져야 한다. 성냥팔이 소녀가 자신의 성냥을 하나, 둘씩 태우기 전에 그 성냥을 한 명이라도 사주었다면, 마지막 성냥을 불태우기 전에 자신의 몸을 포근히 녹일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쉼터라도 제공됐다면 이 동화의 결말이 이렇게 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도 더 늦기 전에 전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수많은 우리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어려운 시기의 우리나라 산업을 지탱해 왔던 것처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어려울 때 온 국가가 힘을 합쳐 그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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