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 배재대 문화예술대학장

나는 추워도 겨울을 좋아한다.

마음을 빼앗길 아름다움이 다른 계절에 비해 많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색이 없는 겨울풍경에 나만의 색을 입히기도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울은 인생과도 닮은 듯하다.

며칠 전에 나는 그림 하는 작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의 심장이 멈추는 이유는 우리가 떠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 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언제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어의가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조문객이 돼 문상을 가서 상주(喪主)를 만나고 어떤 위로의 말을 못할 때 하염없이 울고 통곡하는 상주의 모습에서 망자(亡者)를 갑자기 떠나보낸 슬픔을 감지할 수 있다.

그 깊은 눈물에는 병원에서 죽음을 다루는 냉정하고 차가운 방식도 있어 보이고 삶과 죽음 사이 소중한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아픔에

마음이 메인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지만 나이 들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죽음을 앞둔 환자를 대하거나 갑자기 돌아가신 분의 상주를 대면하면 습관적으로 대충 보낸 나의 어제를 돌아보게 한다.

응급실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황당무계한 일, 소름끼치는 일, 비통한 일이 시시각각 펼쳐진다.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혹은 우리가 그런 위태로운 삶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여기보다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곳은 없다.

응급실은 변함없이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바로 인생은 짧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침의 푸른 하늘이 오후의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 응급실에 오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응급실과 인생의 공통점이 아닐까?

숙연해 진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으로 황망하다. 현재의 나를 인정해 주고 어제의 나를 감사하면서 감사하게 주어지는 내일의 나를 또 감사하면서 보내야겠다.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이 시간도 한 시간 아니 일분 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공간에서 살면서도 우린 너무나 태연하게 산다.

죽음의 문턱이 그리 높지 않은 곳 때로는 의식 없는 신음과 괴성이 산자를 위협한 곳이 응급실인데 그 곳에서 삶과 죽음이 함께하기에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이다.

생각의 시작은 무겁고 신중하지만 끝은 늘 부끄럽고 가벼워진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깊은 사색은 가벼운 몸짓으로 일상이 된다.

그럼에도 생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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