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초대석] 피아니스트 조영웅
피아노 가르치던 어머니 밑에서 자연스럽게 습득
남들보다 늦게 결정한 전공…기초부터 다시 훈련해
러시아·미국 각각 느낌 달라…스파르타식·자유로움
한세대 송지혜 교수님·줄리아 여사님 덕 바뀐 인생
부모님과 약속한 재능기부·받은 사랑 돌려주고파
사회복무 당시 피아노 가르쳐 "꿈 접는 아이들 없길"
지역 중소도시 살면서 문화예술 인프라 격차 느껴
공연장 있어도 공연 없어… 소외지에 무대 선사 노력

[충청투데이 전민영 기자] 충남 서천이 낳은 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있다.

바로 피아니스트 조영웅.

조 씨는 충남 서천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러시아 그네신 국립 음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미국 뉴욕으로 건너왔다. 뉴저지 몽클레어 음대에서 연주자 과정을 마친 뒤 보스턴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조 씨는 2009년 1월 모스크가 국제 음악콩쿠르에서 3위 입상을 했다. 동유럽의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1위 없는 2위를 하기도 했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수상하며 한국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고 있는 조영웅 피아니스트를 만났다. <편집자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 피아노를 쳤다고.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고 들었는데, 남다른 피아노 사랑의 이유가 궁금하다. 하필 왜 피아노였나.

"선교원을 운영하던 어머니가 원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당시 원생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피아노를 치게 됐다. 피아노를 배웠다기보단 놀이의 일부로 피아노를 접하게 됐다. 그때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들은 학원으로 넘어갔다. 나도 학원에 다녀봤는데 정해진 시간에 곡을 연습하고, 선생님께 검사받고 가는 피아노 학원 시스템이 나한테는 안 맞더라. 그래서 주로 집에서 혼자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습했다."

-중학생이 된 후 피아노 전공했다던데, 계기는.

"초등학생 때 혼자서만 피아노를 치다 보니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피아노를 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야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친구들을 보고 충격받았다. 같은 피아노인데 내 연주에선 나오지 않는 소리였다. 그제야 우물 안 개구리였단 사실을 알게 됐고, 제대로 피아노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피아노 전공을 결정했다. 음악을 전공하기에 중학교 1학년은 다소 늦은 나이였다. 보편적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레슨을 받고 예술중학교, 예술고등학교, 음악대학교를 차례로 진학한다. 중학교 1학년 때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는 이야기에 부모님은 물론 주변 사람 대부분이 반대하기도 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탓에 겪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다.

"기본기가 부족했다. 제대로 레슨을 받고 기본기를 다져야 할 초등학교 시기를 혼자 연습하며 보낸 탓이다. 이미 박자도 내 마음대로, 악보 보는 법도 내 마음대로였다. 말 그대로 느낌대로만 피아노를 쳤다."

-해외 유학 시절 ‘기초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을 바꿔 준 은사님을 만났다. 한세대학교 송지혜 교수님이었다. 송지혜 교수님은 나처럼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기본기가 약한 친구들을 문제점을 찾고, 바로 잡아주는 의사 같은 교수님이었다. 당시 교수님이 연주를 듣자마자 "네가 표현하고자 하는 음악성이나 아이디어는 느껴진다. 근데 그 음악성을 표현하기엔 네 손가락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음악성을 표현하기 이전에 기술적인 부분에서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선생님 밑에서 스케일 같은 기본기 훈련을 많이 했다. 스케일이란 한 옥타브 사이에 규칙을 갖는 음의 배열을 의미한다. 규칙에 맞게 음을 배열한 것인데, 향후 곡을 이해하기 위한 밑바탕이 된다. 보통 고등학생 시기는 기본기를 마치고 대학 입시 곡을 준비하고, 콩쿠르에 나가며 경험을 쌓는 시기다. 친구들이 이런 완성단계에 접어들 때 나는 기본기부터 다시 다졌다. 스케일 연습만 하루에 4~5시간씩 했다. 그렇게 쌓은 기본기는 러시아 유학 시절 빛을 발했다. 외국 유학생에 대한 칭찬이 후하지 않은 교수님께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가장 기본기가 잘 다져져 있다"고 칭찬했다.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난다."

▲ 조영웅 피아니스트
▲ 조영웅 피아니스트

-한국에서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러시아, 미국에서 모두 15년 동안 유학 생활을 했다. 러시아 유학과 미국 유학 생활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준다면.

"러시아는 스파르타식 교육이다. 한국하고 느낌이 비슷하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곧 정답이고, 그대로 습득해야 했다. 제대로 된 커리큘럼을 받는 게 처음이었던 나에겐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지도 교수님의 능력과 장점을 빨아들여 기본기를 다지기 좋았다. 하지만 러시아식 교육의 단점은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색깔을 찾고, 성장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러시아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정해진 틀이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교육이었다. 같은 곡이라도 각자의 해석을 존중했고, 각자의 연주 스타일에 대해 토론도 이어갔다. 그 안에서 실력 있는 친구들의 개성과 장점을 한 번에 배울 수 있었다. 러시아의 도제식 교육으로 ‘피아니스트 조영웅’을 만들었다면 미국 유학 생활에선 ‘예술가 조영웅’을 만들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러시아에서 피아노 치는 법에 대해 배웠고, 이후 미국에선 나만의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회복무 당시 아이들에게 재능기부로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들었다. 도시락콘서트, 라면콘서트 등 자선콘서트도 자주하더라. 재능기부에 유독 애쓰는 이유는?

"부모님 영향도 있고, 좋은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처음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조건을 걸었다. 피아니스트가 되면,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재능기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미국 몽클레어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는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귀국하려고 했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된 줄리아 여사님이 박사과정 학비를 모두 지원해주셨다. 아마 줄리아 여사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한국에 귀국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있다 보니 나 또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있는데 거주 지역, 경제적 여건 등으로 상황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멘토가 돼 주고 싶다. 적어도 꿈이 있는 친구들이 상황상 꿈을 접는 일이 없길 바란다."

-학비를 지원해 준 줄리아 여사와의 추억이 많다고 들었다.

"헝가리에서 온 줄리아 라니간 여사님이다. 예술 쪽에 조예가 깊어 예술학도들을 적극 후원해주는 분이었다. 친구 중에 줄리아 여사님의 후원을 받은 친구가 있었고, 함께 자리하면서 알게 됐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여사님을 알고 지냈다. 박사과정을 밟던 첫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알게 된 줄리아 여사님께서 박사과정 학비를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오랜 시간 봐 온 내 성실함을 높게 평가했다고 들었다. 미국은 부유층이 젊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 분위기 잘 형성돼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이번 사례처럼 개인적인 후원도 많다. 줄리아 여사님께선 이후 3년 동안 1억원에 가까운 학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지원해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 나의 성실성과 재능을 보고 아낌없이 후원해줬다는 점. 더 악착같이 노력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지역 공연 활성화가 꿈이라고 들었다.

"지역 중소도시에 살다보니 문화예술 인프라의 격차를 어쩔 수 없이 크게 느낀다. 사회복무 시절 서천군 문화관광과에서 복무했다. 당시 전국 공연장 실태를 많이 찾아 봤는데, 지방에 문화예술의 공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문예의 전당 등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장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연이 없다는 거였다. 공연장에 그랜드피아노가 있지만, 그대로 방치돼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정통클래식 공연보다는 개성 있고 독창적인 공연을 많이 하고 싶다. 독주회 소식만 나오면 전석 매진되는 스타연주가들은 이미 많지 않나. 내 역할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화 소외지 주민들에게 질 높은 클래식 공연은 제공하는 연주가가 되고 싶다. 2019년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일 교류 연주회를 했고, 전통무용과 협업한 공연도 열었다. 정통 피아노 독주회도 좋지만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도 많이 하고 싶다. 연장선상으로 울릉도, 독도 연주회도 꿈꾸고 있다. 울릉도에 문화회관이 있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금난새 씨 콘서트 단 1번밖에 열린 적이 없었다."

-향후 활동 계획은.

"박사과정을 밟기 전 연주자 과정을 수료한 몽클레어대학교에서 반주자 겸 코치로 일하게 됐다. 지금은 비자 문제 때문에 잠시 귀국했다. 비자가 발급되면 미국으로 가 일을 하다 방학엔 귀국해 연주회를 열고, 아이들도 가르칠 예정이다. 장기적인 계획으론 독도와 울릉도 연주회, 한·러 및 한·일 문화교류 연주회 등 다양한 형태의 연주회를 열고 싶다." 전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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