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석 충북교육정책연구소 소장

코로나19 덕분(?)에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이러저러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하나같이 쉽게 대답을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렇기는 하나 늘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자기 생각이 가장 중요하지만, 단순하게 인상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대화 중에 예화를 인용하곤 하는데, 그중에 한 가지가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나왔다. 한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다른 아이는 숯검정이 묻어 까맣다. 누가 얼굴을 씻을까?

가장 단순한 답은 숯검정 묻은 아이가 얼굴을 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 얼굴이 하얀 아이가 세수를 할 수도 있다고 답하게 된다. 다른 사람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이 그런 줄 알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똑같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아이는 하얗고 다른 아이는 까만 경우가 과연 있을까 되묻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에도 단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섣부르게 이렇다 저렇다 판단 내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내 경험도 한 가지 덧붙인다. 송아지 노랫말 이야기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누구나 알고 있는 그 송아지 동요 가사다. 이 노랫말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들었다. ‘왜 우리가 서양에서 들여온 젖소 노래를 불러야 하느냐. 우리 소는 누렁소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민족주의 이념 탓이었을까. 그래서 대학 시절 이후는 ‘얼룩송아지, 얼룩소’ 대신에 ‘누렁송아지, 누렁소’로 바꿔 불렀다.

더 살다 보니, 칡소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온몸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소. 이 칡소를 얼룩소라고도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원래 노랫말은 젖소가 아니라 칡소가 된다. 작사가 박목월이 보았던 소는 젖소가 아니었다.

노랫말 하나조차도 생각이 이렇게 달라져 왔다. 기준과 정보에 따라서 말이다.

더 올바르게 생각하는 법, 더 효과적이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을까. 더 수준 높게 생각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또 누구나 더 잘 생각하는 법, 남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더 깊은 사고에 도달하는 법을 배워서 써먹을 수 있을까?

아들과 나누는 대화는 종종 어떤 분야에 대한 이야기에서 생각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곤 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이러한 ‘생각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말미에 이런 책을 찾아봐라, 집에 저런 책이 있으니 읽어 봐라며 권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생각의 탄생’이나 ‘통찰의 기술’ 같은 책들 말이다.

물론 책 몇 권 읽었다고 해서 갑자기 위대한 생각이 쏟아지고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경험상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복잡한 현상의 숲을 헤쳐 진실을 찾아 나가는 길에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올바르고 효과적인 사고 방법을 활용하는 능력은 정말 필요하다는 점이다.

기실 학교에서도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는 있다. 여러 교과목을 통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사회는 사회학자처럼 생각하기, 과학은 과학자처럼 생각하기가 주요한 내용이 된다.

나는 아들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활용하기를 바란다. 팀 허슨은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생각은 재능이 아니라 일종의 기술이다. 배우고 연습하면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는데, 완전히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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