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바닷가 작은 한의원이다. 옛 가정집을 그대로 겸하는 듯싶다. 주방은 약방으로 거실은 침방으로 사용한다. 딸들과 여행 중에 몸 상태가 심상찮아 찾아온 한의원이다. 접수하고 삼십여 분 남짓 기다리는 중이다. 짧은 시간이 흘렀건만, 작은 어촌의 일상이 눈으로 본 듯 그려진다.

잔뜩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걸어온다. 할머니는 의원을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편다. 그리고는 손에 들었던 가방을 바닥에 툭 던져두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곳엔 나뿐이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멀쑥한데 이어 벽을 넘어 거리낌 없는 대화가 오간다. 침방의 다른 환자들도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닌 친구를 만나러 온 듯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 세월은 널을 뛰듯 출렁이나 누구도 괘념치 않는다. 아니 어느 사이 슬그머니 끼어들기까지 한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참 창령산을 오르는 중이다.

바닷가 주민들에게 한의원은 살방만 같다. 한의사는 쑤시는 육신만 치료하지 않는다. 침을 맞으며 안부도 확인하고 정겨운 말벗도 되니 이보다 좋은 살방이 어디 있으랴. 의사가 작은 어촌에 한의원을 개원한 사실이 궁금하다. 그는 주말이면 아내와 산을 찾는단다. 바닷가에서 산을 찾는다니 독특한 분이다. 평범한 생각으로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아니리라. 그는 작은 어촌의 한의사보다 살방의 주인이 더 잘 어울린다.

한의원을 살방 드나들듯 찾는 할머니가 부럽다. 나에게도 살방처럼 찾는 곳이 있나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사람이 주변머리가 없어 주저 없이 누구를 찾는 일이 드물다. 그나마 즐겨 찾는 곳이 있다면 바다이다. 거침없이 달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물을 좋아하니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백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도 잊는다. 해결되지 않을 고민 따위는 미련 없이 파도에 실려 보낸다. 홀로 와도 외롭지 않고 두서넛이 와도 소란스럽지 않아 좋다. 이쯤 되면, 바다가 나의 살방이 아니련가.

백사장에는 매일 수많은 이들이 발자국을 남기고 떠난다. 모두가 떠난 후 바다는 홀로 그 흔적을 지운다. 바다는 아침이 되면, 다시 말쑥한 모습으로 새롭게 찾아드는 이들을 맞으리라. 푸른 바다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도 자신의 고단함은 투정하지 않는다. 살방처럼 찾아든 이들이 쏟아낸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일 뿐이다. 거듭 찾아도 편안한 연유이리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떠들어대지 않으니 바다에 하소연해도 좋다.

한의원 문을 열자 멀지 않은 거리에서 반가운 파도 소리가 훅 달려든다.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찬란한 햇살이 내 걸음보다 성큼 앞서 걷는다. 나만의 살방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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