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술상용화센터장

이제 얼마 후면 크리스마스다. 그저 하루의 휴일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 특별한 하루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던 자신들이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살게 됐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하나님이라면 예수를 세상에 보내기 전 엄청나게 고민됐을 것 같다. 자신과 교제하며 복되게 살던 인간이 사탄의 꾀임에 속아 하루아침에 관계를 청산하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면, 그들을 그냥 지옥에 보내 버리는 것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런데 예수가 굳이 그들을 위해 세상 속으로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하도 답답해 이렇게 질문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 지금껏 배신만 했던 그들이 내게로 돌아올 거라 믿는가 말이다!"

사실 이 질문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의 기획자이자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할아버지인 오일남(오영수 분)이 우여곡절 끝에 게임에서 이긴 성기훈(이정재 분)에게 던진 말이다. 드라마 끝자락에 휙 지나가는 대사인데 그만 드라마를 본 많은 사람의 가슴에 훅 박혀버렸다. 더 슬픈 것은 등장인물이다. 하나같이 실패자다. 도박에 빠진 백수, 가족을 위해 먼 타국까지 와서 생활하지만 결국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이주노동자, 서울대를 나와 동네의 자랑이 지만 선물투자 실패에 쫓기는 신세가 된 증권맨, 온갖 죽음의 위기를 넘어 탈북에 성공하지만 두고 온 가족을 데려오려 소매치기가 된 탈북녀 등.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섯 번의 게임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456억 원이라는 상금. 이를 얻기 위해서는 경기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같이 사는 방법은 없다. 아니,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포기하고 게임으로 돌아온다. 이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급기야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려 했던 사람들까지 배신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겨우 살아남았는데 마지막에 던져진 질문이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는가?’라니 이 지점에 이르면 작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성공한 사람들은 이와 다를까? 어쩌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는 존재할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듯 같다. 성공을 경험하면 할수록 한 번의 실패가 줄 수 있는 위험을 실제보다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나름대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고 하는 연구현장에서도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실패한 연구에 대해서도 ‘성실 실패’라고 하며 패널티를 주지 않겠다는 정책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에게도 자신이 연구에 실패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실패자로 낙인찍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냐 실패한 사람이냐보다 그 사람들 주위의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이 더 두려운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살아가면서 실패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을 보듬어 주며 위로하고 다시 일으켜 세울 사람이 옆에 있다고 믿는가?’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과연 이런 믿음이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필자는 그것을 ‘공동체’에서 찾았으면 한다. 가족, 이웃, 회사, 지자체, 국가 등 수많은 공동체가 노력하면 가능하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실패자라 낙인찍더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아니다. 너는 다시 잘 할수 있다!’라고 격려해주고 믿어준다면, 아마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거침없이 ‘네, 나는 여전히 사람을 믿습니다’라고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이러한 공동체로 발전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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