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원 오원화랑 대표

고암 이응노는 1904년 1월 12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20년 17세 때 충남 당진군 순성면에서 송태희선생께 동양화 수업을 받았다.

1923년 20세 때부터 서울에 상경, 김규진선생에게 사사하면서 1924년 조선 전람회에 사군자 청죽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더불어 열정적인 그림 수학에 전념했다. 30세에 정병조로부터 고암이란 호를 받아 그때부터 사용했고, 1932년 32세 때 도일 동경천향화숙 송림계월 선생 문하로 입문했다.

동경 천단화학교 동양화학과를 수학하고 동경 본향회화연구소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 수 선전과 그룹전 개인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작가로서의 입지가 구축됐다.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스위스, 일본 등에서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졌다.

필자가 경영하는 오원화랑에서도 개관 24주년 고암 이응노 선생 작품 특별기획전을 개최한 바 있다. 고암 이응노는 1958년 12월 26일 55세 때 도불을 하면서 제2의 삶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다.

고암은 프랑스에 살면서 불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그가 사는 데는 부인이 귀가되고 입이 되어서 생활이 되었다고 한다. 고암은 1956년 독일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현지에 간 후 이듬해 파리로 옮겼다.

파리에서 3000여 명의 유럽인들에게 동양미술을 가르쳤다. 가르칠 때도 부인이나 아들이 통역을 하고 외출할 때도 동반 했다고 한다. 이응노는 확실히 주관이 분명하고 근면 성실한 인간상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하여도 노력 없이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의 독학에 가까우면 서도 자수성가형이기에 부드럽고 강한 성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고암은 항상 우리 민족미술을 새로운 표현으로 승화시켜 국제화하는데 역점을 두고 노력해온 것이다.

그러면서 창작생활 50년을 통해 똑같은 수업을 반복하기 싫어하며 자신이 하던 일을 파괴하는 습성이 지속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으리라 보이는 것이다.

그는 항상 파리에 있지만 내나라 내 민족의 예술을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창작생활은 동양예술의 고유한 전통을 토대로 삼이 무궁한 애척에서 번저나가고 이것을 통해 탄생된 작품들이 국제화단에 고암의 위치를 마련해 준 것이 된다고 본다.

고암의 예술세계를 시기별로 특징을 보자면 86년이란 작품생활에 정말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그런데 그가 그린 작품들은 모두가 다른 형태의 면모를 띄고 있다. 고암의 작품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똑같은 복제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암은 10년 정도의 주기로 6번으로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20대를 우리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적 시기로 보며, 30대를 자연사실주의적 탐구시대, 40대는 추상적 표현의 자연사실주의 탐구시대, 50대에는 구라파의 추상화가 시작됐다.

10년을 사의적 추상이라면, 후기 10년은 서예적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기 시절에는 사군자세계의 전통화 해강 김규진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했고, 청년시절엔 영화관 간판도 그렸다고 전한다.

일본 유학시절 서양화과에 입학해 수학한 사고를 생각한다면 고암은 얼마만큼의 변화를 추구한 인물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문자추상의 신경지를 생각해 보자 동양적 근본을 바탕으로 한 서양적 구성과 조형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창작예술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한 시대의 충청이 낳은 세계적인 고암 이응노 화백께 찬사를 보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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