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술상용화센터장

'그분은 우리 연구원의 새길을 열어주실 분이야!' 필자가 이 말을 들은 날은 연구원에 들어와서 몇 해 되지 않았던 때다. 좀 더 정확히는 수행하던 연구과제가 종료되면서 이 말을 하신 과제 책임자분과 이곳저곳 동분서주하여 새 과제의 수주가 확정된 날이다. 연구자 입장에서 이날은 다가올 한 해 동안 처음으로 본인이 기획한 과제를 주도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기에 단순히 새로운 과제를 한다는 것 이상으로 기쁜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토록 좋은 순간에 그분께서는 새로 수주하게 된 과제 일부를 떼어 다른 연구자에게 수행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당초에 의도했던 사업내용을 수행하기도 빠듯한 예산임을 누구보다 잘 아실 만한 분이신데 이렇게 말씀하셔서 솔직히 요샛말로 '내상(내적상처)'를 크게 입었다. 얼마나 고생고생하며 따온 사업인데…. 그래도 연구원에서 오랜 경험을 하신 분이셨기에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왜 그런 결정을 하려는지 여쭈어보았다.

"그건 말이지…."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후 해주신 말씀은 대략 이랬다. 연구원에 오래 있다 보면 많은 연구자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마치 이미 만들어진 길 위에 새로운 장식을 달아 풍성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러한 기술들이 외부의 관심과 칭찬까지 받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기술 트랜드가 바뀌어 전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너무나도 빨리 기술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이때마다 연구자들은 예전 기술을 버리고 새로운 기술을 쫓아 허둥지둥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바로 연구원이 지속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원천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이 길을 만들어가는 연구자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분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연구환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소한 분야이니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고, 단기간에 성과도 나지 않고 위험만 가득한 것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으니 어떻게 보면 이상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연구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도와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필자는 벌써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에 지금 우리 연구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연구원이 앞장서서 창의적인 연구자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전폭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일들이 그때에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그랬다면 지금의 연구원은 많이 다른 전혀 새로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특히 지난 10월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우리나라 연구자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을 지켜보며 그때가 다시 생각난다. 수상자 발표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뉴스를 통해 수상이 유력시된다는 연구자의 이름과 그의 연구업적이 소개되고 곧 수상자에 포함될 것 같은 기대를 품게 되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은 아쉬움과 허탈함이다.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수상자 모두가 기존에 만들어진 길위를 걸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한결같이 남과 다른 창의적 연구를 하신 분들이다.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 한 가지 부러운 것이라면 그들에게는 새길을 갈 때 존중해주고, 길을 가는 동안 어디쯤 왔느냐고 묻기보다 묵묵히 지원해주는 연구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새길이야말로 미래세대를 부흥케하는 원동력임을 아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벨상은 그들에게 세계가 주는 선물일 뿐이다. 선물은 주는 자의 몫이다. 기대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한다. 연구자들에게 새길을 걷도록 도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길의 든든한 동반자인지를.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