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 이인숙 수필가
▲ 이인숙 수필가

나무 우듬지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저물던 태양 빛도 무심한 듯 제빛 한 줌을 보태고 독야청청하던 청솔 나무도 시월에는 회색빛 방울 견장을 준비한다. 아직은 여름날의 열기가 남았으나 산천은 시월을 준비하는 몸짓들로 부산스럽다.

시월은 풍유와 허전함의 시간이다. 수확에 바쁜 들은 사뭇 부산스럽지만, 볏짚 둥치가 뒹구는 모습은 풍유 속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갈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결이 어디 있으랴. 계절을 분간 못 한 민들레가 바지런한 할머니 손에 뽑혀 빨간 바구니에 소복이 담긴 모습도 시월의 풍경이 된다. 이렇듯 부산스러운 마을 풍경과 달리 산사에 찾아든 시월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동행한다. 문득 지난해 산사에서 줍던 꽁지 하얀 알밤이 떠오른다. 나무의 결을 살려 지은 해우소는 오래된 밤나무와 어깨동무하고 있다. 밤나무 둥치를 그대로 두고 조금 비켜서 자리한 해우소,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산사람의 여유로움이 시월과 닮았다. 이른 감은 있지만, 올해도 산사의 밤톨만 한 밤 맛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느새 무명치마 양 호주머니도 불룩하다. 해우소 옆 밤나무 밤은 아직 덜 여물었는지 떨어진 밤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찻방 뒤편에는 알밤이 지천이다. 풋밤의 속껍질을 손톱으로 살살 밀어내 까먹는 유혹을 어찌 뿌리치랴. 줍다 보니 호주머니 가득 욕심이 넘친다. 한주먹을 꺼내 슬그머니 풀숲에 던져 산속 식구들의 양식을 탐낸 미안함을 덜어낸다. 한주먹 덜어내도 더없이 풍족한 시월이다.

밤나무 옆 솔가지 끝이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양은 아니나 보이는 것이 없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이번엔 옆 가지가 출렁거린다. 자세히 보니 몸집 작은 새 한 마리이다. 시월엔 들에도 산에도 먹을 것이 지천이건만, 솔가지에 찾아 든 것은 풍족한 먹이에 여유로워진 몸짓인가. 새에게도 시월은 천국의 시간인가 보다.

하루를 생업에 목숨 걸듯 살아가는 이에게 '한유'란 낯선 단어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한유란 단어를 맘껏 부리고 싶다. 이런 날이 있어 많은 날을 위로받지 않으랴. 시월은 짐승도 사람도 생업에 바쁜 그대도 조금은 한가로이 노닐어도 좋으리라. 이가지 저가지 옮겨 다니던 새가 '포로록'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고 산사를 내려온다.

시월의 밥상도 진수성찬이다. 집에 도착하니 서둘러 가을맞이를 떠난 친정 오빠가 산 버섯을 푸짐히 놓고 갔다. 그뿐이랴. 붉은빛을 띤 고구마도 상자째 놓여 있다. 가을걷이가 풍성한 것을 보니 산천이 울긋불긋 색동옷 입을 날이 머잖았다. 냄비에서 가을이 보글보글 끓고 서녘에는 붉은 노을빛 시월이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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