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수 ETRI 기술상용화센터장

프랑스의 문호 생텍쥐페리가 1943년에 출간한 '어린 왕자'는 전 세계 수많은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다. 이 소설을 보다 보면 어른과 아이를 대비하며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아이가 새로운 친구가 생겼을 때 어른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 친구 몇 살이지? 형제는 몇이냐? 키는 얼마나 크니?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버시니?" 그리고 답을 얻으면 이런 숫자만으로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아는체한다. "그 친구의 목소리는 어때? 어떤 놀이를 가장 좋아하니? 나비 채집은 하니?"와 같은 질문은 중요치 않다. 또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저는 장밋빛 벽돌로 지어지고 창문에는 제라늄 꽃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있는 아름다운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지만, "(1943년 시세로) 2만 달러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금세 "오 굉장한 집이구나"라고 감탄한다. 숫자로만 세상을 이해하려 사람, 그들이 바로 어른이다.

필자도 기술창업과 관련된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다 보면, '어린 왕자'속의 어른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올해 기술창업은 몇 건이나 할 계획이지? 창업한 기업의 성장을 위해 몇 건 지원할 거야? 창업한 기업 중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은 몇 개지? 상장은 얼마나 했고 수익은 얼마나 남겼어?" 온통 수치로 답을 해야 하는 것들이고 그것에 답하려고 정신이 없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기술창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재정이 투입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으레 이러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답하다 보니 정작 기술창업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말 필요로 했던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아쉬움이 들곤 한다. 기술창업을 꿈꾸는 연구자들이 왜 창업을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지, 창업했으면 신규 인력도 확충하며 사업도 확장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혼자서 주춤주춤하고 있는지, 그들은 무엇에 행복해하고 어려워하는지, 그 어려움은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와 같은 것들을 세심하게 살필 겨를이 없다.

더군다나 출연연의 기술창업이라는 것이 그동안 연구개발이 전부인 줄 알고 기술창업에 대한 애정이나 별다른 관심조차 없었던 척박한 땅에서 이뤄지는 탓에 더 섬세한 돌봄이 필요했을 터인데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기술창업의 씨를 너무 많이 뿌리면 땅이 거친데다 아직 돌보는 사람의 역량도 충분치 않아 뿌리도 내리기 전에 말라 죽을 것이고, 아직 꽃 피울 만큼 크지도 않은 나무에게 빨리 자라라고 양분만 주면 잔가지만 무성해질 뿐 꽃은 더 늦게 피고 말 것이다. 조심해서 씨를 뿌리고, 나무의 성장상태를 살펴 때에 맞게 퇴비와 물을 주어야 한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바람막이도 설치하고, 나무가 시들어 보이면 온실로 옮겨 다시 생기가 나도록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활동이야말로 단순히 숫자로 표현되지 않지만, 꽃을 피우기 위한 진정한 노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기술창업의 꽃을 피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술창업의 꽃을 피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른처럼 기술창업이 많이 늘어나는 것, 창업한 기업 매출이 성장하는 것, 투자수익이 높아지는 것과 같이 숫자로만 정의하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기술창업으로 피워야 할 꽃은 단순히 숫자의 의미를 넘어서야 한다. 연구자가 수년 아니 수십 년간 자신의 혼을 담아 개발했던 기술을 가지고 창업을 통해 비상함으로써 행복과 성취감의 날개를 펼쳐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와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출연연의 기술창업은 연구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니라 설레하며 가고 싶은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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