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 이인숙 수필가

때론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아니 매 순간 힘겨운 결정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집단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에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며칠 생각이란 것을 하지 말자며 24시간 죽은 듯 잠든 적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없이 푹신한 침대 속에서도, '나는 지쳤어. 힘들어'라고 소리치며 떠난 여행길에서도, 어김없이 돌아와 삶을 이어간다. 이전보다 힘차게 속도를 내기도 하고 간혹 브레이크를 밟아 느린 속도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삶의 방식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삶의 몸부림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학창 시절 밤을 새워 시험공부를 하던 시간도,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고자 노력한 수많은 시간도, 소원하는 마음은 같다.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자식만큼은 잘 키우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도 자식이 '사는 것처럼 살게'하고 싶은 것이 아니랴. 익숙하여 눈길을 주지 않았던 문구가 불쑥 다가와 말을 건네는 느낌이다.

코로나19 2차 백신을 맞고 주말 내내 꼼짝없이 누워있다. 1차 접종 때와는 또 다른 반응 때문이다. 접종한 팔뚝 주변으로 붉게 번진 반점의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 병원에서 일러준 대로 진통제를 먹고 얼음찜질로 버틴다. 이 또한,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한 코로나 사태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내고자 하는 몸짓이다. 통증과 가려움을 잊고자 책을 펼치지만, 그도 쉽지 않아 포기한다. 삶이 무기력해지려는 순간 소식 없이 찾아온 두 녀석이 그래서 더욱 반갑다.

녀석들은 이방 저방 고양이 찌루를 쫓느라 부산스럽다. 친정 언니가 손주 녀석들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밥을 먹지 못한다는 말에 미역국도 한 냄비 끓여왔다. 녀석들은 작은할머니네 고양이 찌루가 보고 싶어 왔겠지만, 나는 언니보다 녀석들이 더 반가우니 마음의 흐름을 어찌하랴. 관심의 대상이 다를지라도 녀석들도 나도 더없이 만족하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서로가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이리라. 상대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 오고 가며 안부를 묻고 기억해주는 이가 있으면 충분하다. 지금 그대의 머릿속에 스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대는 충분히 사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녀석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두통도 어지럼증도 꼬리를 감춘다. 추석 명절이면, 녀석들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나니 벌써부터 미소가 절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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