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천 충북도의원

그 때는 다들 그렇게 살아왔듯 어려웠던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고도 청년시절까지 우리 집은 생활형편이 쉽게 좋아지질 못했다.

이런 가운데 친구들 역시도 끼리끼리 모인다고 고등학교와 청년시절 생활이 어려웠던 또래들이 참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세 살 터울 안팎으로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며 만났던 친구들이지만 모였다하면 밤을 새기가 일쑤였고, 좁디좁은 방에서 연탄가스 냄새를 맡아가며 일곱 명이 새우잠을 청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일곱 명이 달려들어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교회 안에서 만난 친구들이었고 노래를 좋아하다보니 중창단을 만들어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모두가 갓 청년시절 무렵에 우리는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려울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서로를 의지하고 친 형제처럼 지냈기에 '의형제'를 맺기로 한 것이다. 남자만 일곱, 그래서 모임이름이 '일곱아들'

적어도 군대 가기 전과 군대에 가고 난 후에도 우리는 늘 함께 모였다. 휴가나 외박을 나오면 모두가 함께 지냈다.

라면을 끓여먹고 때로는 고스톱도 치고 여전히 밤을 새고 놀러 다니며 몰려다니고 그리고 미래에 대해 고민을 참 많이도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지냈던 친구들이 한 둘 결혼을 기점으로 조금씩 멀어지고 자주 만나지 못했다.

모두가 함께 '우리는 잘살 수 있다!'라는 생각들과 '열심히 살자!'라는 생각으로 참 치열하고도 열정적으로 살았고 때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도 하고 안부인사와 전화 한 통 없이 무심하게 지나갈 때도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우리 젊은 날의 '일곱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각자의 사는 지역이 다르다보니 우리는 먼 발치에서 서로의 소식을 보고 듣고 있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본격적으로 서로의 소식을 묻고 점차 또다시 만나기 시작한 것이 나이 40 중반 이후 이었던 것 같다.

저를 비롯해 일곱 명의 아들들은 어렸을 적 그 가난을 뒤로하고 우리들이 소망했던 작은 꿈들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렇게 소박하게 꿈을 꾸던 우리들이 서울 대기업 병원 팀장겸 대표이사로 신문사 부국장으로 주식 펀드매니저로 이태리와 한국을 오가는 무역상과 통역가로 태국 선교목사와 그리고 광역의원으로….

젊은 날의 소박했던 꿈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꿈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1명은 소식을 잘 접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아직까지 정착할 자리를 잡지 못하고 혼인도 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그저 단체 카톡방에서 우리들이 전하는 소식들만 눈 팅으로 보고 있다.

한 번은 일곱 명중 몇 명이 모일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는 스스로 우리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기적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지금은 각자의 맡은바 자리에서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자주 소식도 전하고 이따금씩 자리도 함께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일곱아들의 모임은 미완성이다.

여섯 아들들은 이제 충분히 자리 잡고 믿음생활도 잘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한 아들은 여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여섯 아들들은 여전히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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