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와촌초등학교 주도연 교장

어린 시절, 소풍 가는 날을 앞두고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기다렸던 일이나, 책보를 몇 번이나 싸고 풀기를 거듭하면서 입학하는 날을 기다렸던 일들은 누구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기다림은 새로운 환경과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 자체가 축복이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슴이 가득 차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기쁨과 에너지의 원천이 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

인생을 표현할 때 기다림이라고도 한다. 인생은 기다림 속에서 태어나고, 기다림 속에서 자라다가 기다림 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기다림이 없거나, 무엇인가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허무하고 의미 없는 시간일 것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인생에서의 행복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일 것이라 생각된다. 나폴레옹이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교관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똑같은 병력, 똑같은 지형 조건에서 똑같은 무기를 가진 두 곳 군대가 싸운다고 하자, 과연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은가?’. 그의 답변은 ‘마지막 5분까지 견디는 자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였다고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은 기다림으로써 결정되는 것이다.

기다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대하며 사는가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를 기대하기도 하고, 우리의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이러한 기다림은 꿈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꿈이 없다면 기다리는 그 자체가 고역일 것이다. ‘언제 성적이 오를 것인가?’, ‘언제 부자가 될 것인가?’, ‘언제 건강이 회복될 것인가?’ 등등 살아가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어떻게 하여야 하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랄 수 있음을 믿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일 좋은 어른은 누구일까? 끝까지 기다려 주는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일 것이다. “넌 반드시 될 거야, 너는 너대로 쓰임 받을 거야!”라고 하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다림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고, 마음의 힘을 굳게 해 줄 수 있다. 혹시 부족하게 보이는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기다려 주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19세기 말, 미국 뉴욕의 최대 도시문제는 교통 문제였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마차였는데 마차 택시나 노면 전철선에서 말이 끄는 차량 등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도시의 가장 큰 문제는 차가 막히거나 사고 나는 문제보다 차를 끄는 말에서 나오는 배설물이었다. 말의 배설물은 악취와 더러움은 물론 전염병을 옮기는 근원이었기에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도무지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고 고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기다리기라도 한 둣 심각했던 도시문제가 불과 1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반이 되어 간단히 해결됐다. 교통수단이 말이 아닌 전차나 자동차로 변화됐기 때문이다.

가을에 열리는 풋사과는 기다림으로 맛을 낸다. 시고 맛이 없던 푸른 색깔의 풋사과가 붉은 색깔을 띠며 아름답게 변하면서 달콤한 맛을 낸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기다림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기다림의 언어는 남아 있으나 기다림의 현실적 힘은 사라지고 있다고도 한다.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해할 것은 아이들의 꿈을 빼앗고 그 자리에 현실의 중요성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꿈 없이 살도록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가장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이런 마음을 전해 주고 싶다.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마음껏 꿈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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