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준 ETRI 미래암호공학연구실 책임연구원

수 년 전부터 필자는 초등생 딸을 위해 어린이 과학잡지를 구독해 오고 있다. 잡지에서 양자역학에 대한 연재만화를 다룬 적이 있는데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매우 어려운 내용임에도 재미있는 스토리로 잘 엮어내 아이들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양자역학은 주로 사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에서의 물리적 현상, 즉 중첩, 얽힘 등과 같은 현상을 다루는데,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와 전혀 다른 특성을 보여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이미 1980년대부터 폴 베니오프, 리차드 파인만과 같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적 성질을 활용하는, 이른바 양자컴퓨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양자컴퓨터 개발은 가능한지, 개발이 된다면 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그런데 1994년 피터 쇼어에 의해 소인수분해를 빠르게 풀 수 있는 이론적인 알고리즘이 발견되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얻게 됐다. 현대 공개키 암호 알고리즘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RSA 암호가 현존하는 컴퓨터로 소인수분해를 풀기 어렵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만약 쇼어 알고리즘을 동작시킬 수 있는 양자컴퓨터가 개발된다면 현재 사용 중인 암호 기술의 상당 부분을 바꿔야 한다.

필자는 2019년 초부터 암호에 관한 양자안전성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해당 연구는 RSA를 포함해 현재 ICT 환경에서 사용 중인 다양한 암호를 공격하기 위해 어느 정도 수준의 양자컴퓨터를 요구하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한다. 이로써 양자컴퓨터 시대에 실질적 안전성을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 중이다.

양자시대 암호해독 가능성과 그에 따르는 암호 전환 등 시기를 더욱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인 셈이다. 이 분야는 관련 분야 선진국조차도 연구가 더딘 형편이다.

따라서 한때 양자역학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경험을 가진 필자는 연구 시작부터 큰 도전으로 느껴졌다. 2년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남들이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큰 산을 조금씩 오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달 말 ETRI는 양자내성암호 분야 최고 수준의 국제학술대회인 'PQCrypto 2021'을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 학회의 산업 트랙에서 필자가 속한 연구그룹은 암호 양자안전성 분석 플랫폼 ‘Q|Crypton’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플랫폼 공개를 통해 암호에 대한 양자 알고리즘 시각화 구현, 양자 자원량 기반 보안강도 자동 측정 등이 가능함을 보여줬다. 전 세계 관련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이 과정을 통해 양자안전성 분석 분야만큼은 우리가 외국을 선도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어 큰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양자컴퓨터 시대를 대비해 할 일이 많다.

남들이 가지 않거나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것에는 늘 두려움이 따른다. 어쩌면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남들이 이미 우리를 따라잡은 것은 아닐까? 라는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그저 문제 푸는데 급급했던 세계를 훌훌 털고 벗어나 새로운 분야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연구자로서 행복을 느낀다.

아직은 정상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산길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계속해서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암호 양자안전성 분야에서 훨씬 더 가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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