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밤새 내리던 비는 날이 밝아와도 잦아들 줄을 모른다. 장마철답게 높은 습도와 기온 탓에 잠을 설치고 우중충한 기분으로 어둑새벽을 맞이했지만 줄기차게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낭만적으로 들려와 그나마 감사했다. 굵어진 빗줄기에도 거리에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여전히 분주하다.

빗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유리창을 통해 밖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전화기로 날아든 시 한 편이 마음을 고요히 젖게 한다. 들풀에게 삶을 물으니 흔들리는 일이고, 물에게 삶을 물으니 흐르는 것이며, 산에 삶을 물으니 견디는 것이라고 민병도 시인은 삶을 노래했다. ‘삶’이란 시구가 화두 되어 한동안 상념에 잠기게 한다. 들풀보다 먼저 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에도 주체 없이 흔들리던 심지 약한 그런 날이 내게도 있었을까. 황량한 들판에 뿌리를 내린 것도, 모진 세파를 만난 것도 아니건만 한 줌 미약한 바람결에도 무수히 흔들렸던 날들이 있었다. 인생무상이니 허무니 하며 화선지보다 얇은 판단으로 삶을 논하던 풋내나는 시절을 젊음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방황의 끝에서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옳다는 걸 깨달았을 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와 들풀처럼 뿌리 내릴 것을 왜 그리 숱한 날들을 흔들렸는지.

세월의 강을 따라 물처럼 살려 했던 날들도 무수히 많다. 그것은 삶의 긍정이었으며 꿈을 찾아 나아가는 희망의 여로였다. 어떤 형태의 세상이 내 앞에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아량과 화해로 포용하며 묵묵히 한곳으로 흘러가는 강물이길 간절히 희구하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큰 바다를 향한 그 길은 돌무더기도 넘어야 했고 죽은 나무뿌리도 적시며 변덕 수다한 사투에서 홀로 감내해야 하는 외로운 여정이기도 했다. 세월 따라 정연히 흘러만 가면 되는 줄 알았던 물길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급류에 휘말려 길을 잃기도 했고 물길을 거스르며 튀어 오르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고픈 날들이 몇몇 날이었던가. 나는 아직도 아담한 산을 가슴으로 그리며 산다.

비바람과 눈보라와 땡볕까지 한자리에서 묵묵히 견디며 사계의 변화를 요란스럽지 않게 보여주는 작은 동산이 나였으면 한다. 사철 푸른 소나무 사이로 산바람이 넘나들고 세상살이 부대끼며 지친 누구라도 찾아들면 쉬이 산 한 자락과 그늘을 내어주는 너그러운 그곳의 품성을 가슴 안에 품고 싶다. 아름드리가 아니어도 좋을 갖가지 잡목들로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쁜 풀꽃들이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자박자박 피어나는 동산을 오늘도 꿈꾼다. 들풀처럼 순진무구하게 흔들리며 유유자적 강물같이 흐르다가 아직도 산을 꿈꾸며 살아가는 내게 삶이 뭐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이젠 힘주어 말해도 될까. 흔들리고 흐르다 견디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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