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교진 세종특별자치시교육감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인가 '경쟁력'이라는 말을 신봉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무엇은 국제경쟁력이 없다"거나 "무슨 대학은 경쟁력에서 뒤쳐진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농산물에게도 '농업경쟁력'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합니다.

마치 현대 사회에서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사라져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 어떤 직종은 소멸하여야 한다는 것은 정말 섬뜩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각자가 타인과 경쟁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협력하는 곳입니다. 협력하지 않으면 세상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타인의 손길과 선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쿠팡 창고에서 불이 났을 때, 소방대의 구조대장이 돌아가셨습니다. 불이 일단 잠잠해지자 인명을 구조하는 구조대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화재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서 화재 현장으로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소방공무원들이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을 걸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희생자를 구조하기 위해서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는 결정을 하는 것은 자발적인 선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선의가 모여서 우리가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타인에 대한 협력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옆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더운 여름 들판에서 고생한 농부가 우리에게 보내준 것이고, 내가 입은 이 옷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분진 속에서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아침 거리가 깨끗한 것은 내가 자고 있던 그 시간에 청소하는 분들이 청소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이 구체적으로 우리 이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서로 협력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바로 세상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교육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성적입니다. 그것도 상대평가에 의한 석차에만 주목합니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보다는 우리 아이가 몇 번째 인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배워야 할 것들을 잘 배웠다는 기쁨보다, 다른 아이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또는 덜 배웠다는 것에 의해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세종에서 고교평준화를 도입할 때, 반대 논리의 핵심은 하향평준화였습니다. 아이들이 경쟁하지 않으면 학습효과가 떨어질 것이라는 가정에서 나온 주장입니다. 이것은 "학생(사람)은 기본적으로 게을러서 경쟁을 시키지 않으면 공부(업무)에 소홀할 것이다"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사람에 대한 불신이 기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교평준화 이후 세종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업성취도는 올라갔습니다. 학생은 치열하게 경쟁해야 공부를 더 많이 한다는 전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잘못된 신화입니다.

경쟁은 사람들을 동질화시킵니다. 같은 목표를 같은 수단을 이용해서 타인의 기록을 깨는 것이 경쟁입니다. 나와의 경쟁이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서로 유사해지고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서로 다른 목표, 서로 다른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할 때, 가장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경쟁은 나와의 경쟁입니다. 그래야 그 성취 역시 나의 것이 됩니다.

대한민국 학교에서 이뤄지는 상대평가에 의한 줄 세우기는 우리 아이들의 다양한 미래를 단순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능 비중 확대라는 대입제도의 변화가 안타까운 것입니다. 친구가 협력의 동료가 되어야 할 학교에서 순서를 다투는 경쟁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교학점제와 절대평가제에 거는 기대가 있습니다. 다양한 트랙에서 각자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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