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동 충북도 행정국장

어느 새 여름이다. 기온이 30도를 넘었다. 벌써부터 에어컨 바람이 반갑다. 요즘 들어 차츰 여름이 빨리 온다고 느껴진다. 봄은 잠시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스치듯 지나가 버렸다. 계란후라이를 닮은 개망초꽃들이 물결을 이루고 보리밭은 누렇게 변해 간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먹을 게 많이 부족했다. 특히 이맘때면 더 심했다. 오죽하면 보릿고개라고 불렀을까.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산과 들이 간식 창고였다. 마땅한 주전부리가 없던 그 시절 아이들은 자연에서 그것들을 찾았다. 그 자체가 놀이였다.

감자 두둑을 파서 새알만큼 자란 날감자를 후벼 먹기도 하고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기도 했다. 둥지 속 새알과 개울에서 잡은 가재 송사리도 색다른 간식거리였다. 6월 중순이 되면 산딸기며 오디가 익는다. 빨갛게 익은 산딸기와 까만 오디는 배고픈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최고의 간식이었다. 산과 들로 다니며 이것저것 따먹노라면 손과 볼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맘때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가 밀떼기다. 마른 솔가지로 불을 피우고 누렇게 익은 밀대를 한아름 가져와 밑동을 잡고 꼬투리를 불에 그을린다. 밀 꼬투리가 불 속으로 툭툭 떨어져 거뭇거뭇 해지면 나뭇가지로 토닥토닥 두들겨 재를 털어낸 다음 손바닥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부벼 입으로 후후 불면 잘 익은 밀알만 남는다. 이렇게 잘 익은 밀알을 입안에 한 줌 털어 넣고 씹으면 구수한 불맛에 톡톡 터지는 식감이 어우러져 그 맛이 그만이다. 요즘 아이들은 그 맛을 알리 없겠지만 필자는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한참을 먹다 보면 두 손과 얼굴이 숯 검댕이가 된다.

온종일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아이들은 해 질 녘이 돼야 집으로 돌아온다. 땀범벅 숯검댕이들에게는 등짝에 우물물 두어 바가지면 끝이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녁은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과 열무김치를 넣고 비빈 비빔밥이 전부다. 양푼을 가운데 놓고 둥글게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면 맛은 둘째치고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다투다 꾸지람도 듣고는 했다. 그때 일들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밤이 되면 마당가에 쑥대로 모기불을 피운다. 멍석에 누워 부채로 더위를 쫓으며 누나가 들려주던 달걀귀신 얘기, 처녀귀신 얘기는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웠다. 밤하늘 별을 보며 견우직녀 얘기며 떡방아 찢는 토끼가 살고 있다는 할머니의 달나라 얘기는 여름밤 더위를 잊게 해주던 자장가였다.

에어컨이 없이도 선풍기가 없이도 냉장고 얼음물 없이도 그 시절에는 그렇게 여름을 이겼다.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가 생각난다. 무릎베개하여 부채를 부쳐주시던 어머니 얼굴도 어른거린다. 모든 것이 부족했어도 부족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러울 것도, 더 바랄 것도 없던 그 시절…. 문득문득 그때가 그리워진다.

요즘 도시인들의 로망 중 하나가 전원생활이라고 한다. 필자도 그중 하나다. 중년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프로를 즐겨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가끔 마당에 모깃불 피워 놓고 손자들에게 옛날얘기 들려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한다.

본격적인 여름이라고 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날씨는 벌써 한여름에 들어섰다. 세상은 온통 코로나19로 시끄럽다. 다섯 명 이상은 모이지도 말란다. 잠 못 드는 여름밤 친구가 그립다. 주말에는 시골 친구를 봐야겠다. 평상에 자리 깔고 옛 얘기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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