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맞아 ‘한훈 선생’ 떠올려
계룡시 신도안면에 은거… 결사대 조직
해방 이후 자주 독립국가 완성 노력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힘쓰신 분들의 공훈에 보답한다는 의미로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호국영웅들의 넋을 추모하며 생각하는 달이다. 6월에는 1일이 '의병의 날', 6일은 '현충일', 25일은 '6.25전쟁일'이 있는 달이다.

이렇게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일제 때 독립운동을 크게 펼쳤던 한훈(1890~1950)선생의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16세의 어린나이에도 홍주의병(1906년)에 가담하여 일제와 대항했다.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몸담게 돼 일본압제에 대한 의열 투쟁의 정신적 바탕이 됐다. 홍주 의병이 실패한 후 이곳 신도안에 은거하면서 1907년에 을사 5적의 처단을 위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했었다. 이때 나철, 오기호 등도 같은 계획을 수립했는데 선생께서는 지방결사대로 참여하려고 했으나 나철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비밀결사대 조직한 뜻을 기념하기위한 ‘광복단결사대기념탑’이 선생께서 살았던 가까운 곳 신도안면 정장리 172~6에 1907cm의 높이로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한훈 기념관’도 선생께서 살았던 곳에 건축해 완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를 하고 있어 이곳 신도안면 정장리가 모름지기 충청지역의 호국보훈 성지가 됐다. 선생께서 을사5적 처단계획이 실패한 뒤, 당시 악질인 직산군수를 처단하고 만주로 1차 망명길에 올랐다.

조국과 만주를 오가며 애국지사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채기중을 만나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을 조직하고 광복단 대표로 만주에 가 권총을 구입해 귀국했다. 선생께서 활동지역을 전라도로 넓혀서 곽한일, 김재순 등과 조선침략원흉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을 벌이다가 발각되어 다시 만주로 망명을 했다.

이후 국내로 다시 들어와 대한광복회에서 활동을 했다. 이어 전라도지역 책임을 맡아 군자금모집과 의열 투쟁을 하면서 1916년 보성의 양재성과 별교의 서도현을 처단하고 순창의 오성헌병분대를 습격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에 광복단 결사대를 조직해 암살단 김상옥과 함께 미국의원단이 내한할 때 환영 나온 조선총독, 정무총감 등을 처단키로 했으나 입국 하루 전 김상옥의 집 수색으로 선생께서 체포되어 19년 6월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일제에 투쟁하는 불굴의 저항의지를 나타내다가 192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광복단을 재건해 서울에 본부를 두고 이곳 신도안에 지부를 설치, 광복정신에 기초한 자주적 독립국가의 완성을 위해 헌신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공산군에게 끌려가 학살당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2012.1.5. 국가보훈처 제공 '이달의 독립운동가' 참조)

선생께서는 60평생 동안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나라만을 위해 의열 투쟁한 큰 인물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렇게 헌신하신 한훈 선생께서 걸어 온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광복정신을 본받아 우리와 자라나는 꿈나무들 모두가 나라사랑 정신을 계속 이어나가야 되겠다.

최욱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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