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수필가

연필 깎는 소리가 명쾌하다. 연필 아랫부분을 검지로 받치고 엄지로는 칼날의 머리에 힘을 준다. 나무 조각이 생선 비닐처럼 떨어지고 연필심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면지를 깔고 연필심을 다듬는다. 순간 '뚝' 하고 심이 부러진다. 손아귀에 힘을 너무 주었던가. 연필을 깎을 때는 손가락 힘 조절이 필요하다. 힘이 과하면, 연필심은 힘없이 부러진다. 연필을 잡고 조심스럽게 다시 깎는다. 필통에 곱게 다듬은 연필을 키 순서대로 나열한다.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로 작은 연필은 따로 모아둔다. 아까워서도 꼭 필요해서도 아니다. 쓰기에는 불편한 몽당연필이지만, 정이 들었는지 쉬이 버려지지 않는다. 샤프라는 예쁘고 기능 좋은 것을 두고 굳이 깎아 쓰는 연필을 고집하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냥 깎아 쓰는 연필이 좋아서라는 정도이다. 손에 잡히는 감각도 좋지만, 연필을 깎는 과정도 즐긴다. 아니, 유년 시절 필통을 열어 부러지고 뭉툭해진 연필을 깎아주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연필에 대한 애착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필통 속에는 곱게 깎인 연필이 가지런하다. 아버지는 호롱불에 의지해 부러지거나 짧아진 연필을 깎아주신다. 간혹 나도 연필을 깎아보지만, 뭉툭하게 깎이거나 연필심이 부러져 볼썽사나운 모습이 된다. 아버지가 단정하게 깎아준 연필의 모양은 흉내를 내지 못한다. 종이 위에 글씨를 쓸 때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도 참 좋다. 당신이 깎아준 연필로 글자를 쓰고 문장을 적으며 딸은 소녀에서 숙녀로 다시 어른이 된다. 어느새 긴 내 인생도 몽당연필을 닮아가는 듯하다.

인간과 연필에 삶의 한 부분이 닮은 듯하다. 나무라는 물질이 연필심을 감싸고 있듯 우리네 몸은 마음이란 가늘고 깊은 심을 품고 있다. 오랜 세월과 삶을 기록하느라 마음심은 점점 닳아간다. 때론 생의 거친 바람에 흔들리고 부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진 몸을 일으켜 희망이란 단어를 품는 것은 마음이지 않던가. 굵고 엉망으로 쓰인 글씨마저도 자신의 삶이란 생각에 이를 때 비로소 몽당연필처럼 작아진 생을 발견한다. 하지만, 몽당연필은 볼펜 꽁지에 매달려 본래의 길이보다 사유 깊은 문장을 적지 않던가. 노인에게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것과 같다.

연필을 깎아 가지런히 정돈하니 기분이 좋다. 호롱불 아래 연필을 깎던 당신을 떠올리며 날카롭던 마음결도 정돈한다. 연필도 인생도 적절한 힘 조절이 필요하리라.

새 연필이 어느새 몽당연필이 되었듯 내 삶도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 하지만, 마음은 갓 구입한 연필인 듯 생기가 넘친다. 이제부터는 지나온 삶을 되짚어 몸과 마음을 차근차근 다독여 나아가리라. 종이에 연필 스치는 소리가 그리움을 부른다. 당신의 온기가 느껴지는 양 연필 하나를 손안에 꼭 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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