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오월의 산야는 청청하다.

눈을 돌려봐도 어느 곳 하나 칙칙한 곳이 없다. 창문을 열어 제키고 상큼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니 며칠 동안 흐릿했던 내 감정도 좀은 맑아지는 느낌이다.

며칠 전 병원에서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 의사의 진단에 자존감이 살짝 눌려 감정이 잿빛이었다. 면역력 부진으로 난시가 된 것이 노화 단계 중 하나라며 이것 또한 굵어지는 나이 등에 짊어지고 여생을 함께해야 할 몫이란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인데 시력을 조금 잃었거늘 무얼 그리 서글플까. 더구나 길게 이어진 펜데믹으로 행동반경까지 좁아졌으니 내 육신도 세태에 맞게 진화하는 것이 마땅하련만 조금씩 멀어져가는 젊음에서 못내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

불편함은 있지만 안경으로 대체하고 거리를 나서니 침침하던 시야가 좀은 선명해져 가라앉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푸른 잎이 무성한 숲길로 들어 몇 발자국 걷는데 불현듯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이 듦에 잃어 가는 것도 있지만 새로 얻어진 것들이 익숙해지면 그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감사가 되더라며 신체기능의 불편함을 되레 미화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수십 년 전,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쯤 되셨을 때 노인성질환으로 청력을 거의 잃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삶의 풍파를 겹겹이 껴안아 가슴으로 막아내고 참아내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노화의 바람만은 그렇게 결국 비끼지 못하고 해가 갈수록 신체의 건강을 하나씩 내려놓으셨다.

난색을 표하던 가족들과는 달리 이젠 귀도 쉬게 해줄 때라며 호탕하게 웃고 돌아서 나가시는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은 흡사 고향집을 수백년 지키던 둥구나무와 같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육신의 조각을 낙엽으로 떨구고 삭정이로 한 가지씩 부러트리면서도 긴 세월을 묵묵히 한자리만 지키며 흔들리지 않던 굵더란 둥구나무와 아버지는 참 많이도 닮은 듯 싶었다.

자식들의 지붕이 되고 바람벽이 되고, 마당이 되었던 우리 아버지의 풋풋한 젊음은 둥구나무에서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듯 세월의 강물을 따라 자박자박 그렇게 지고 말았다.

세월 앞에서 서글픈 인정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잃어가며 젊음은 시들어 간다는 걸 아버지 자신도 모르진 않았으리라.

늘 당당하고 호기가 넘치게 평생을 사시던 분이셨기에 그 후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불편함은 여생에서 더 크게 자존감을 떨어트리고 삶을 허무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그때 철없던 자식은 아버지의 늙음을 인생의 순리이고 삶의 단계라 쉽게 치부했으니 이 큰 불효를 어찌할까. 제 몸의 작은 결함 하나에 주눅이 들어 우울해하는 우매한 자식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면 지금쯤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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