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석 충북교육정책연구소장

코로나19로 인한 학생 간 학력격차 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게다가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 주된 내용은 중위권이 실종되고 상위권과 하위권 중심으로 성적이 양극화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보도에서는 인문계 고교의 경우 상위권도 줄고 중, 하위권이 늘어나 피라미드 모양이 되었다고도 한다.

공부하는 학생들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하향되었다니 걱정이 된다. 게다가 중위권이 사라지고 대다수가 하위권이라니…. 상급학교 진학을 생각하면 더구나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가 뭔가? 원격학습 또는 제한된 등교학습 때문이라고들 한다. 더 자세히는 원격학습의 효율성 문제에다 상호작용 없는 과제형 학습 탓을 하기도 한다. 더러는 상위권 학생의 자기주도 학습력을 중하위권 학생들이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자발성이 부족한 학생의 학습동기 등 학습 관리를 적절히 해주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한다. 일각에서는 코로나19로 더 커진 사회적 양극화와 관련시키기도 한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는 가정에선 사교육비를 더 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최근의 학력 격차 보도는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학력 양극화 또는 학력 하향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특히 중위권 학생의 학력 하향을 핵심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전례 없는 역질이 초래한 학력 저하나 기초학력 문제를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나 대중의 반응을 보면서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가. 재난의 먹구름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먼저 물을 것이 학력이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학력에 관한 것일까. "마굿간에 불이 났다. 조정에서 퇴근한 공자가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느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논어에 전하는 공자의 일화다. 재물이나 말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공자의 사상을 엿보게 한다. 공자의 예를 따른다면 우리는 상처받은 아이는 없느냐고 먼저 물었어야 했다.

1990년대 유행한 명상가 라즈니쉬의 우화집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무리의 친구들이 정말 버릴 수 없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는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를, 다른 친구는 자신이 선택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내를 이야기 했다. 집을, 그리고 농장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된 나스루딘이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배꼽이 없으면 살 수 없다네." 친구들이 설명을 요구하자, "나는 휴일이면 침대에 편히 누워 감자를 먹는다네." 감자와 배꼽이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었다. "이해를 못하는군. 배꼽이 없으면 소금 놓을 곳이 없어진단 말일세." 배꼽을 소금 놓는 곳으로 집착하는 나스루딘이라는 인물과, 학생을 성적 따고 학력 챙기는 존재로만 보는 우리의 인격은 얼마나 다를까. 어른들조차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를 언급하는 지경이다. 아이들에게 가해진 재앙의 상처는 얼마나 많으며 또 깊을까. 관계가 차단되고 활동이 위축된 이태 동안 아이들은 존재의 위기를 겪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장과 발달의 존재인 아이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 먼저 물어야 될 것은 "얼마나 힘들어?"라는 질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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