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훈 충북시청자미디어센터장

인류는 예전부터 인간은 어떤 종족인가를 끊임없이 성찰해 왔다.

과거에 인간은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라고 규정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는 물건을 잘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호모 파베르'라고 규정했다. 한결 과거보다는 명확해졌지만 생각해 보면 동물도 집을 짓고 황홀한 향수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역시 이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언가 창작하고 생각을 하며 사회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요한 호이징하(1872~1945)는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임을 강조하며 '호모루덴스'라고 외쳤다. 이 의미를 지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선사시대부터 놀이는 문화의 한 부분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였다. 우리 민족의 특성을 표현한다고 할 때 '흥'은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는 농경사회에서 '일' 자체가 축제와 놀이로 구성된 즐거운 사회였고 삶을 지탱하는 핵심인 공동체 생활의 원동력은 놀이였다.

먹고살기 위해서 억지로 해야만 하는 활동은 일이 아니라 노동이다.

원래 인간은 일과 놀이가 분리된 삶이 아니었다. 사람의 신체 리듬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에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맞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삶이 즐거웠던 사회가 근대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노동력을 사고팔게 되어 자본가는 돈 주고 산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노동과 놀이를 분리했다.

이제 현대인은 노동이 끝난 후에 노는 이분법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신체 리듬이 아닌 외부의 환경에 의해 변화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게 당연히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본래 인간의 세상을 살아가는 리듬의 방식이 모두 파괴되고 모든 것이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아무도 나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공포는 끝없는 노동을 강요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더욱더 우리에게 살기 위한 풍요로운 삶을 위해 노동을 요구한다. 과거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의 삶은 훨씬 바쁘고 힘들어졌으며 노동은 고통스럽지만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행복을 위해 무언가 끊임없이 준비하며 끝없이 연기되고, 미래에 대한 공포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공포를 추진력으로 하는 노동은 당연히 고통스러운 의무일 수밖에 없다.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들은 골라 먹는 디저트처럼 짧고 달콤한 놀이를 보상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남는 시간을 때워 줄 뿐인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우리가 휴일에 가족 단위로 북적이는 놀이공원, 유원지, 백화점 등을 가는 것들은 누군가가 미리 정해놓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놀이의 조건은 무엇인가? 바로 우연에서 오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세계 속에 즐거움이 있고, 그것이 놀이의 기본이다. 그리고 삶을 즐긴다는 것은 삶의 규칙을 바꿔내는 것이고, 규칙의 주인이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하며 그 삶에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사실 논다는 것도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골목길에서 동네 친구들과 놀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에 열심히 참여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 놀이를 즐기면서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무한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삶' 그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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