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출퇴근 시간이 애매한 덕에 거의 앉아서 간다. 그러던 어느날 퇴근길에 눈이 왔다. 그래선지 평소보다 승객이 많았다. 팔자에 없는 만원 버스를 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탈 땐 아니었다. 그러다 몇 정거장 지나 만원 버스가 됐다. 내 자린 뒤편 혼자 앉는 창가 쪽이었다. 사실 내심 좋았다. 조금 불편한 합석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 눈에 띄지 않는 자리다. 고로 '내적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피곤함에 '못난 쾌재'를 불렀다. 앞쪽에 앉으면 늘 '양보의 딜레마'에 빠졌었다.

☞내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게 느껴졌다. 애써 시선을 폰에만 집중했다. 보게 되면 왠지 자리를 양보해야 할 거 같았다. '노년 아닌 중년일 거야'라며 멋대로 판단했다. 못나고 못됐었다. 착하기엔 피곤했다. 스스로를 비난하며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다 그분이 다리를 절룩거리는 걸 봤다. 그 순간 양심이 벌떡 일어났다. 자리를 양보하니 몸 대신 마음이 편해졌다. 그게 나았다. 자동반사였던 내 다리를 보며 '아, 역시 사람은 선하구나' 하고 감히 성선설을 단정 지었다.

☞그 생각은 바로 깨졌다. 때아닌 눈사람 때문이다. 이번 폭설로 다양한 눈사람들이 나타났다. 대전에선 대전대 한 카페 앞 '엘사 눈사람'이 화제였다. 그 눈사람은 카페 점주가 만든 것이었다. 손님들에게 작은 웃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꽤 정교했기에 SNS 명물이 됐다. 그걸 보기 위해 찾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엘사는 하루 만에 사라졌다. 녹아서 없어졌으면 숙명이니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 남성이 부순 거였다. CCTV를 보니 굳이 눈치를 보며 부쉈다. 참 배배 꼬인 사람 많다.

☞눈사람엔 생명이 없다. 진짜 사람이 아니니 부숴도 처벌은 안 받는다. 하지만 그 사람의 폭력성이 의심된다. 누군가는 그 주먹이 눈사람 다음엔 사람을 향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비약적인 해석일 수도 있지만 틀린 것 같진 않다. 눈사람은 동심으로 만들어진다. 또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싫으면 그냥 지나치면 된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를 굳이 부숴야 할까. 자신이 싫다고 남도 보지 말란 건 못돼먹은 이기심이다. 내 생각이 틀렸다. 모두가 착하지 않다. 그냥 이유 없이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도 많다. 성선설은 틀렸다. 맹자가 틀렸다.

김윤주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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