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영 작가

평소와 같이 작업을 위해 빈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 아무 생각이 안 들 때가 있다. 마치 처음 그림을 그리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무슨 작업을 해왔는지 어떤 작업을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나에게 되물어 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매일 작업실을 오가며 봐왔던 건축물들과 풍경을 기억해보는 일이다. 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건축물의 형태와 생명체들은 대부분 현실의 풍경을 기억과 재조합해 변형시켜 만든 모습들이다. 일상의 평범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과 풍경이지만 작업의 소재로 관찰을 하게 되면 전혀 다른 일상으로 보이게 된다.

주인이 없이 빈 채 몇 년이 지난 건물은 창문과 문이 떨어지고 천장은 비를 막아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외부와 내부를 구분할 수 없는 형태가 돼버린 건물을 보면 우린 단단한 외벽으로 이어진 건물 안에서 보호받는 것이 아닌 언제 부숴 질지 모르는 얇은 껍데기의 보호를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건물 한 채는 몇 달에 거쳐 완공되지만 건물 철거 작업은 오전에 시작해서 오후도 안돼 완료가 된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건물도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슬한 삶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건축물 사이로 우리의 일상이 존재하고 있다.

작품의 소재에서 건축물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연물이다. 거리를 보면 건물처럼 정렬된 채로 자연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매일 보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지만 한동안 관찰하며 지켜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거리의 나무나 넝쿨들은 하나같이 원래 있던 장소가 아닌 옮겨진 자연물들이다. 인간이 건물을 구축하듯 자연물 또한 우리가 보기 좋게 쳐내고 깎아내 만든 인공물이 돼간다. 도로와 인도 사이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은 형태로 깎여진 나무가 일정하게 세워져 있다. 각지게 깎여져 있는 넝쿨과 잔가지는 다 쳐내고 일정한 거리에 차례대로 정렬된 나무, 인도로는 못 내려오게 막아둔 공원의 잔디 등 인간의 입맛에 맞게 구조돼 있는 자연을 보고 있으면 자연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군 생활 시절 GOP에서 7개월 근무한 적이 있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철책 너머 DMZ 속의 자연풍경을 바라보면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 60년 이상 방치된 자연의 모습은 마치 처음 마주하는 미지의 모습 같았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의 자연에서 오히려 미적인 아름다움을 느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기억이 내겐 자연을 기억하는 기준이 된 듯하다.

이렇듯 내게 일상은 꽉 차게 구축돼 완성된 도시같이 보이지만 속은 비어있는 건축물과 껍데기만 가득한 자연으로 다가온다. 어제와 같았던 평범했던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도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질 때 작품의 소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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