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강대국 진나라는 조나라를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와 염파(廉頗)에 의해 번번이 실패하고 쫓겨 갔다.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은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고 총명해 많은 사람들이 병법에 대한 이론은 아버지 조사를 능가한다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조사는 아들에 대해 “전쟁이란 목숨을 걸어놓고 하는 것이지 결코 장난이 아니다. 그 놈은 종잇장 위에서 군사를 운운 하는 데 불과하다.(紙上談兵) 또한 천성이 오만하고 실전경험이 부족해서 장차 그가 장수로 기용되면 군대를 망칠 놈이다”하고 경계했다.

그 후 조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 틈을 이용해 진나라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제 혼자서 조군을 지휘하게 된 염파는 진나라와의 정면충돌을 피하며 장기전으로 이끌어 적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적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성을 지키기만 할 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진나라에서는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 멀리 원정을 온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첩자를 조나라 도성에 침투시켜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싸움을 피하는 늙은 염파가 아니고 조괄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적이 싸움을 걸러 와도 지키기만 하는 염파를 못마땅해 하던 조(趙)나라 효성왕(孝成王)의 귀에도 이 소문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당장 염파(廉波)를 해임해 버리고 조괄(趙括)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겼다.

재상 인상여(藺相如)가 철회를 간청하고 조괄의 어머니까지 나서서 극구 반대했지만 효성왕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군대의 지휘권을 줜 조괄은 염파의 방어일변도 작전과는 달라 적군에게 공세를 취했다.

마침내 진나라 명장 백기(白起)의 계략에 서서히 말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백기는 거짓으로 지는 척 달아나며 조나라 군사를 유인해 두 갈래로 갈라놓아 버렸다.

계교에 빠진 줄도 모르고 식량마저 끊긴 상태에서 40여 일을 버티다가 장수 조괄이 전사하자 항복했다.

그러나 백기는 40여 만이나 되는 조나라 군사들을 모조리 생매장시켜 죽였다.

이 싸움이 유명한 장평전투인데 이때의 참패로 말미암아 조나라는 그 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 이야기에서는 지상담병(紙上談兵) 외에도 병사지야(兵死地也), 교주고슬(膠柱鼓瑟) 등의 성어(成語)가 만들어졌다.

<국전서예초대작가및전각심사위원장·청곡서실 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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