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106. 악질 문화재 도둑 '가루베']
공주고보에 부임한 일본인 교사 가루베, 유물수집 과제 낸 뒤 빼돌려
농부 제보로 알게된 고분 혼자 발굴하다 뒤늦게 총독부 박물관 보고
해방 뒤 유물 갖고 일본으로 달아나… 日박물관 등에 기증·밀매하기도

▲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 6호분 전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1927년 공주고등 보통학교, 흔히 '공주고보'라고 불리는 지금 공주 고등학교에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일본인 국어 교사가 부임했다. 일본인이지만 국어선생이면서도 백제 역사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는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우선 그의 아버지가 일본에서 문화재를 전문으로 하는 골동품상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공주에 부임하자 학교에 향토관을 만들고 방학 때는 유물 수집을 과제로 내게 했다. 학생들이 가져 온 유물 중에는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 많았는데 일부는 학교 향토관에 전시하면서 진짜 값어치 있는 것은 몰래 개인이 소장하거나 일본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한번은 가루베가 계룡산 갑사에 들렀다가 절에 있는 동종(銅鐘)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그는 갑사의 스님과 교분을 쌓은 다음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며 며칠만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스님은 가루베가 명문 고등학교 선생님이라 기꺼이 빌려 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 소식이 끊어졌고 가루베는 그 종을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갑사 측에서 몇 번 동종을 돌려 달라고 했으나 학생들이 분실했다는 등 이런 저런 핑계로 시간만 끌었다.

그러자 갑사 스님은 공주 경찰서에 고발을 하기에 이르렀고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자 할 수 없이 가루베는 동종을 갑사에 반환했다는 것이다.

이런 가루베에게 어느 날 공주에 사는 농부 한 사람이 찾아왔다. 공주 송산리에 있는 자기 밭에서 일을 하는 데 곡괭이로 땅을 파니까 밑에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난다며 제보를 한 것이다. 가루베는 순간적으로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직감으로 그 농부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고분이 묻혀 있음을 감지하고 이 중요한 제보를 한 농부에게 돈 몇 푼을 주고 비밀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는 법에 의해 신고를 해야 함에도 자기 혼자 발굴에 들어갔다.

1933년 7월29일 마침내 그는 지금 사적 13호로 지정된 6호 고분의 배수구를 찾아냈다. 6호 고분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에 '송산리 벽화고분'으로 명명될 만큼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고, 천정과 벽에는 청룡, 백호, 해, 달 등 그림이 그려져 있어 우아하고 부드러운 백제의 미를 간직한 고분.

그런데 그는 더 이상 혼자서 발굴을 못하고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보고를 했고 총독부 관계자들이 현지에 급파됐다. 하지만 총독부 관리들이 6호분에 와서 보고 놀란 것은 내부가 매우 깨끗했다는 것이다. 가루베는 "발굴해 보니 이렇게 깨끗했고 토기 같은 부장품만 몇 점 놓여 있었다"고 보고했지만 학계에서는 가루베가 공주에 오자마자 사냥개처럼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분 찾기에 미치다 시피 한 것을 보아 이미 불법 도굴을 하여 귀중품을 빼돌린 후 후환이 두려워 총독부에 보고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 학계에서는 가루베를 가르켜 '천인공노할 유물 약탈자'라고 까지 비판을 가하고 있다. 사실 그가 이런 도굴만 하지 않았으면 그 무덤의 주인공이 어느 임금인지, 어느 왕비인지 밝혀졌을 것이고 엄청난 백제 유물이 문화재로서 빛을 보았을 것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가 없다.

그는 대동여고(지금 대전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전근을 갔다가 1943년부터 해방이 될 때 까지 강경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가루베는 '유물 도둑'의 본성을 드러냈다. 재빨리 간직했던 유물을 이삿짐으로 위장, 도망치듯 일본으로 달아난 것이다.

공주 유지들이 강경상고에 달려가 교장실과 사택을 뒤졌지만 이미 그가 떠난 뒤였다.

공주 유지들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미군사령부에 가루베의 송환과 문화재 반환을 청구하는 등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루베는 공주에서 훔쳐간 백제 유물을 일본의 박물관과 대학에 기증하기도 하고 일부는 밀매를 하여 치부를 하면서 이 덕으로 일본 니혼대 교수까지 하다 1970년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