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의 서예이야기 425]

중국 후한 말 서주에서 순욱(筍彧)의 구호탄랑(驅虎呑狼) 계교에 걸려들어 여포(呂布)에게 참패를 당하고 갈 곳이 없던 유비(劉備)는 결국 조조(曹操)를 찾아갔다.

그러자 조조의 책사(策士) 정욱(程昱)이 말했다.

“유비는 야망이 큰 사람이고 영웅의 기상이 있습니다. 그를 지금 없애 버리지 않으면 후일에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참모인 곽가(郭嘉)가 반대하며 말했다.

“기껏 오갈 데 없이 찾아온 사람을 죽인다면 승상의 명예를 손상 시키고 천하통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서로 다르자 조조는 곽가의 말에 따라 유비를 받아들여 곁에 뒀다.

이렇게 해서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유비는 조조가 나이 어린 황제를 핍박하고 국정을 제멋대로 농단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있을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으나 빠져나갈 구실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술(袁術)이 가지고 있던 전국옥새를 원소(袁紹)에게 받치고 오를 것을 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비는 지금이 호랑이 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조조를 찾아가 말했다.

“원술이 원소를 찾아가려면 반드시 서주를 지나가야 합니다. 제게 군사를 주신다면 서주에서 지키고 있다가 원술을 사로잡아 바치겠습니다.”

조조는 별 생각 없이 허락하고 군사 5만을 딸려 보내면서 주령과 노소에게 유비를 감시 하도록 했다.

유비가 수도 허창(許昌)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지에 나가 있던 정욱과 곽가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서 조조를 찾아 먼저 정욱이 입을 열었다.

“제가 유비를 없애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승상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그에게 군사를 내보내는 것은 용을 바다에 풀어놓고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같아서(종호귀산:縱虎歸山) 후일에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 즉시 되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조는 급히 사람을 보내 회군하라 명했지만 호랑이 굴을 빠져나온 유비가 응할 리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비롯돼 어떤 일을 명쾌하게 마무리하지 않고 후한을 남기는 것을 비유할 때 종호귀산(縱虎歸山)이라 했다.

<국전서예초대작가및전각심사위원장·청곡서실 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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