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어느덧 이십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새천년을 한 해 앞둔 초 가을날 문학이란 뜨락에 주춧돌 하나 얹고 작문의 첫걸음을 떼어 놓던 그날의 감정들을 되돌아본다. 점점 멀어져가는 청춘 앞에서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가던 그즈음 먼 꿈으로만 알던 수필작가란 또 다른 삶을 향해 걸어가던 그 길은 신성했다.

수필 한편을 써서 문학교실로 달려갈 때마다 땅바닥에 뭉개져 있던 자존감이 우뚝우뚝 살아나는 것을 실감하는 그 시간은 그야말로 희열이었다. 꿈을 향해 살아난 열정과 굼틀대며 솟아나는 감성의 조우는 내게 행복한 충격이었다.

흩어졌던 삶의 편린들을 한 조각씩 맞추어가며 엉킨 감성의 실타래에서 추억을 끌어올리는 작업은 숱한 밤을 하얗게 불태웠었다. 잃어버린 자존을 수필로 건져 엮어가며 미혹하지 않다는 사십대를 솔바람처럼 살았었다. 과한 욕심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등단이란 문턱을 넘어서니 여물지 못한 탓인지 평범과 비범 사이에서 양쪽이 다 버겁기만 했다. 필력이 달릴 때마다 왜 글을 쓰려고 고뇌하는지 자신에게 반문하는 날이 많아졌다. 밤새워 쓴 글들을 아침햇살에 비춰보면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어져있었다. 그렇게 써내려간 글들은감성이 메마른 푸석한 낱말들의 조합들로 휴지통에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럴수록 글쓰기 작업은 가슴위에 얹은 돌덩이처럼 회의감이 되어 무겁게 짓눌러댔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청정한 작품이 나온다며 작품과 작가의 인격이 같아야 한다는 은사님의 일침은 빳빳한 솔잎으로 폐부를 찌르는 듯 따갑고 아프기만 했다.험한 가시밭길 같은 세월이었거나 가슴 벅찬 행복 충만의 날이었다 해도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는 건 언제고 심성을 아련하게 자극하는가 보다.

청솔 잎 다발로 자존심에 일침을 가하시던 은사님의 지적도 이젠 적당한 방패로 막을 줄도 알고 호탕한 너스레로 비켜 갈 줄 아는 혜안 아닌 요령을 세월에서 배웠다면 지금은 더 크게 호령하실라나. 낭득허명을 깨우쳐 주시는 은사님의 회초리를 외면하고 그냥 문학이란 울타리를 뛰쳐나와 연필을 놓아 평범한 아낙으로 안주했다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 자신에게 그 선택을 칭찬했을까. 그렇다면 이 쓸쓸하고 스산한 늦은 가을날, 황혼에 물들어가는 하늘을 어떤 감정으로 마주했을는지.

글을 쓰면서 살아온 많은 시간들 속에는 좌절도, 회의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함이 뭇별만큼이나 많다. 온유하며 겸허하게 글을쓸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 삶의 일부다.

푸른 소나무는 북풍한설에도 청청하다,

글을 쓰고자하는 나의 열정 또한 스무 번의 만추를 더 보낸다 해도 지성의 뜨락에서 청청하게 살아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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