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부터 연산군까지 모신 내시 김처선… 그의 고향 세종시 전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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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부터 연산군까지 모신 내시 김처선… 그의 고향 세종시 전의면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12월 03일 19시 48분
  • 지면게재일 2020년 12월 04일 금요일
  •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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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104 왕의 남자… 김처선의 고향 전의]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모신 내시
돈에 흔들리지 않는 청렴함 빛나
세조·성종, 파격승진으로 '예우'
연산군 매일 퇴폐행위하자 직언
다리 잘리는 등 처참하게 죽게돼
양아들·7촌이내 친척까지 ‘처형’
247년 뒤 영조에 의해 명예회복
▲ 세종시 전의면 동교리. 세종시 제공

TV 드라마나 사극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김처선이다. 어떤 사극에서는 아예 그를 '왕의 남자'라는 타이틀로 주인공처럼 다루기도 한다. 환관이라고도 하고 내시라고도 하는 궁궐 속의 특이한 남성으로서 김처선 만큼 그렇게 역사에 회자된 인물도 드물다.

김처선의 고향은 지금 세종시에 편입된 전의면 동교리. 전의 초등학교 서쪽 운동장으로 추정하고 있는 데 연산군이 그를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집을 불사르고 연못을 팠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어려서 고향 전의를 떠나 궁중에서 내시로 들어 간 것이 세종대왕 때- 그러니까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까지 일곱 임금을 가장 가깝게 모셨다. 그만큼 역대 임금들이 옆에 두고 수족 같이 부릴 정도의 신임을 받았다. 세조 임금은 그를 원종공신 3등에, 성종은 자헌대부에 승진시키는 파격적 예우를 했다.

그야 말로 김처선은 '왕의 남자'였다. 심지어 그는 연산군에 의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연산군은 어린 시절 김처선의 등에 업혀 클 정도였다.

이렇게 역대 왕들의 총애를 받은 김처선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직언을 하다가 화를 입기도 했다.

세조는 한 때 그를 처벌하여 관노로 궁궐에서 추방까지 했으나 곧 불러 들였다.

그러나 역대 임금들이 그를 버리지 않고 '상선내시'로 옆에 두려고 한 것은 그의 충성심과 청렴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많은 고관대작들이 내시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정치공작'을 시도했으나 김처선은 정도를 지켰다는 것이다.

김처선은 평생을 그렇게 왕실에 충성했으나 결국 그 충성심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1504년 4월1일. 그 날 궁궐로 떠나면서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부인과 양아들에게 충성심과 효에 대해 특별한 당부를 했다. 양아들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내시의 신체적 구조 때문에 아들을 입양해서 길렀던 것.

그날 연산군은 처용무 춤판을 벌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음란했다. 원래 처용무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온 가면을 쓰고 추는 춤. 연산군은 이것을 자기 취향에 맞게 아주 음란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퇴폐 행위를 일삼았다. 그래서 이날 김처선은 작심하고 아뢰었다. "전하, 역대 임금님을 모셨습니다만 이토록 문란한 임금은 없었습니다. 제발 중지 하소서"

그러자 연산군은 "환관 주제에 감히 혓바닥을 놀리느냐!"며 옆에 있던 활을 잡고 김처선을 향해 화살을 당겼다. 김처선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이번에는 칼을 들어 마구 휘둘렀다. 이때 연산군은 김처선의 다리를 절단했는데 "네 이놈 일어서라!"하고 소리지르자 "다리가 잘렸는데 어떻게 일어섭니까? 부디 음란행위를 멈추십시오"하고 끝까지 직언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처선은 처참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연산군은 김처선을 이렇게 죽이는 것에 끝나지 않았다. 김처선의 양아들까지 처형했으며 그의 7촌 이내의 친척들도 모두 처형했다.

심지어 김처선의 고향 이름을 없애고 그의 집도 불태워 없앤 후 연못을 팠다.

연산군의 증오심은 광적이었다.

김처선의 이름 '처'자가 들어간 것은 모든 기록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심지어 자신이 즐겼던 '처용무'도 '풍두무'로 고쳤고, 전국에 '처'자가 이름에 들어간 사람은 빠짐없이 개명하게 했다.

김처선의 명예는 그로부터 247년이 흘러서야 회복됐다. 1751년 영조 임금이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고향에 정문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정문'이란 충신, 효자, 열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집이나 고향에 세우는 붉은 문을 말한다.

그래서 전의 출신 유지들이 한 때 전의에 그의 기념비라도 세우자고 했는데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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