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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로지위(朝露之危).

전국시대(戰國時代) 위(衛) 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태어난 상앙은 타고난 재능에다 쉬지 않고 학문을 연마한 끝에 능히 세상을 경영할 만한 실력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위(魏)나라에서 등용이 되지 못한 그는 인재를 우대하는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상앙은 특히 법률 이론에 밝아서 법치주의를 통한 부국강병책을 주장했는데 그의 해박한 법률 이론을 높이 평가한 진나라의 효공(孝公)은 그에게 좌서장(座庶長)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또한 불합리한 법률을 뜯어고치고 일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그의 건의를 모두 허락했다.

상앙이 신법을 시행한 지 10년 만에 나라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재정도 충실해졌으며 국가가 또한 막강해 후일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엄정하기만 하고 융통성 없는 법의 적용으로 인해 귀족을 비롯한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로부터 깊은 원한을 사게 됐다.

심지어는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에게까지도 사소한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크게 망신을 준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은 효공이 상앙에게 강력한 믿음과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반대파들은 숨을 죽인 채 기회를 오기를 기다릴 뿐 진정으로 그에게 승복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조량(趙良)이라는 사람이 상앙을 찾아와 충고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을 믿는 사람은 흥하고 힘에 의존하는 사람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상군(商君)의 목숨이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에 맺힌 이슬과도 같습니다(조로지위:朝露之危) 오래 살기를 바라신다면 닥쳐올 위기에 빨리 대비하십시오.”

그러나 상앙은 이 말을 듣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 후 상앙의 강력한 후원자인 효공이 죽고 혜문왕(惠文王)이 즉위하자 반대 세력들이 상앙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태자 시절 사소한 실수로 그에게 망신을 당한 일이 있는 혜문왕이 그를 보호해 줄 리 없었다.

그제야 위태로움을 느낀 상앙이 달아났으나 마침내 붙잡혀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상앙은 현실을 도외시(度外視)하고 너무 엄한 기준만을 고집하고 충언(忠言)을 외면하다 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훗날 진나라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국전서예초대작가및전각심사위원장·청곡서실 운영·前 대전둔산초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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