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재 대전보건대 장례지도학과 교수

가로수가 온통 형형색색의 자태를 뽐내며 울긋불긋하게 물들었다. 한때 가로수의 고전처럼 생각되던 울창한 플라타너스를 쉽게 볼 수 없게 되고 자리를 메타세콰아어나 이팝나무 외에도 이름 조차 기억할 수 없는 다양한 수목이 식재돼있다. 그중에서도 열매가 익을 때 육질의 외피에 함유된 헵탄산 때문에 나는 고약한 악취로 호불호가 엇갈리는 은행나무만큼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며 길거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춘기 때 은행나무 잎을 주워 책갈피 사이에 끼워 넣으며 추억을 쌓았던 적이 나한테도 있었다. 은행잎에는 곤충들이 싫어하는 플라보노이드 외에 다양한 종류의 살충제 성분이 있어 책갈피 사이에 끼워 놓은 잎이 책을 좀벌레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은행잎에 감성과 과학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며 유일하게 한 번도 진화하지 않은 채 단일 수종을 이루며 1억 9000만년을 버텨온 은행나무는 중국 양쯔강 하류의 텐무산 지역이 자생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잎의 생김새로 인해 활엽수처럼 보이지만 침염수로 분류되는 이나무는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은행의 행자는 살구나무를 칭하는 살구행자이다. 잎이 마치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압각수로 불린다. 영어 이름이 진코로 알려져 있지만 서양에서는 금발의 양갈래 머리 소녀를 닮았다고 메디안헤어트리라고 한다.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나 표범이 먹잇감을 사냥하면 부드럽고 영양가가 풍부한 내장을 먼저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때 나는 냄새가 은행의 열매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다고 한다. 과거 쥐라기 시대에는 공룡이 은행의 열매를 먹고 먼 거리를 이동해 씨앗을 전파시킬 수 있었다. 더욱이 열매의 독성 때문에 서양인들은 은행을 먹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추운 겨울날 퇴근길 포장마차에 들러 은행꼬치 한 줄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던 아련한 추억이 있는데 이때도 익혀서 먹기 때문에 은행은 종족 전파의 기회가 차단돼 자생지인 중국에서 조차 극히 제한된 일부에서만 식생하고 있다고 한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이 세상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 게다. 은행나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수 억년을 생존해 왔지만 협업 파트너가 사라진 지금은 유전자 속에 들어있는 자손 전파 본능조차 실천하기 어려운 딱한 처지가 됐다. 손잡지 않고 살아난 생명은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협업은 꽃과 벌나비라고 한다.

늦가을 코트 깃을 여미고 은행잎으로 짙게 물든 가로수길을 거닐며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지인들에게 한 통의 전화라도 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아보는건 어떨까? 코로나 이후 인간의 삶은 기존의 고정관념인 경쟁적 사고를 넘어선 소통과 협업을 중심으로 하는 언텍트 사고를 지향해야 존속이 가능할 수 있는게 현실이며 우리는 이미 그 현실 속으로 빨려 들고 있으니 더욱 그러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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