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산행을 위해 집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는 키 큰 나무들과 잡목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복잡 난해하다. 숲속을 헤집고 길을 만들며 오르려니 얼마 가지 못하고 체력의 한계인 듯 숨이 찼다.

풀숲을 헤집으며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마치 순례길 인양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목을 축였다. 오늘만큼은 내가 선택한 도전이 결코 무모하지 않았음을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반추하며 용기를 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 산행에서 문득 오체투지를 떠올렸다.

오체투지는 스스로 고통을 겪으며 온전히 부처님께 나를 맡긴다는 의미를 갖는 수행 방법이며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불교 예법이라 한다. 단순한 도전의식으로 나선 산행에서 불교신자도 아닌 내가 감히 오체투지 예법을 거론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안다. 허나 수풀을 헤집으며 길을 만들어가는 동안만큼은 공손하고 경건하게 몸을 낮추며 수양하는 마음으로 한걸음씩 산을 올랐다.

오만과 편견으로 며칠째 시끄러웠던 속내를 심산유곡의 정기로 씻어보려는 요량으로 시작한 산행은 등성이를 얼마만큼 오르니 험하면 험할수록 몸은 고달팠지만 가슴이 뛰었다. 삶에서 겪는 큰 고난이 끝나갈 때 느끼는 희열 같은 설렘도 있었지만 경거망동한 심성을 담금질하려는 듯 내면의 나를 향해 강한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가장 척박한 땅에 떨어진 씨앗 하나로도 풍성한 추수는 할 수 있다. 작은 씨앗이 튼실한 알곡으로 거듭날 때까지 자중자애하며 때를 기다려라. 한손을 꼭 쥐었으면 다른 손은 풀줄아는 여유와 관대함을 갖아라.'

산의 초입에서 갖은 마음과는 달리 등성이 한 구비를 넘어 깊은 산의 품속에 들수록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차분해지는 것은 이것이 정녕 수행자의 마음가짐인가보다.

등산의 기쁨은 상봉을 정복했을 때 가장 크다 했던가. 꼭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오른 건 아니지만 그곳에는 먼저 다년간 사람들의 족적들만이 무수히 남아있는 산의 일부일 뿐이었다. 깊은 산의 의젓하고 푸르른 품에 들고 보니 나는 한낮 잡풀처럼 한없이 작고 낮은 존재일 뿐인데 무엇을 그리도 드러내고 싶어 했던가. 정상 또한 능선을 타고 오르고 내려가는 한 과정일 뿐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큰 나무들과 잡목사이에서 불어오는 산들 바람만이 부질없는 번민 따위는 덧없는 것이라는 듯 온몸을 무심히 홅고 지나간다.

세상의 무심한 바람결에 흔들리지 말고 평정심을 잃지 말아라. 산은 내게 이른다. 뒤엉켜 살아온 잡풀들처럼 지나온 세월도, 헤쳐 나아가야 할 날들도 돌부리와 가시밭길이 뒤엉켜있을지라도 한 송이 풀꽃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하늘을 향해 높게 뻗은 큰 나무들만이 산을 이룬 것이 아니라고 산은 내게 말을 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