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학 시인

청량하다. 별들이 찰랑찰랑한 가을이다. 그러나 연일 코로나다. 전파력도 세고 누가 감염되었는지도 모르고…… 피로도가 이만저만 높아져 간다. 정말, 어찌해야 하나 싶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꽃들은 피어난다. 우리들은 우울해, 절망해, 피곤해 햇빛만 가득한데 말이다. 채송화며 나팔꽃이며 국화는 기뻐해, 감사해, 뭉클해다. 필자는 그 햇빛이 자꾸만 경이롭다. 가을꽃들의 그 햇빛 고백을 생각하면 멍멍한 가슴이 찬연해진다. 마른 마음에 윤슬이 인다.

소방용 CPVC 파이프 및 스프링클러 조립하는 생산 팀에서 근무한지 만으로 삼 년 삼 개월째다. 공정은 제단과 면치기, 조립, 포장 순으로 네 단계를 거친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오고 가셨다. 일의 강도며 환경, 낮은 임금 등이 그 이유였다. 회사를 운영하다 오신 분들도 있었고 한 직장에서 이삼 십 년 근무한 분들도 꽤나 있었다. 학력이 높은 분도 있었고 투잡을 하는 분들도 있었다. 연령대는 대략 사십 대부터 육십 대 후반까지 참 다양하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단지 생물학적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더 일할 수 있지만 퇴사를 해야 했던 형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상하다. 그래서일까.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어느 형님의 고백은 슬프기까지 하다. 다른 형님들도 노후 자금은 둘째로 치더라도 자녀 학자금이며 결혼자금 등 당장 들어갈 돈이 하나둘이 아니라 한다. 그렇기에 온몸이 몽둥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통증으로 아파도 출근한다. 숨이 턱턱 막히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은 혹서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혹한에도, 선풍기와 백등유 온풍기로 이겨내만 한다. 작업 현장은 녹록하지 않다. 무엇보다 오직 생산량으로만 계측되는 노동의 가치가 그 엄혹한 현실이 급여 명(命)세서처럼 서글프다. 형님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만든 소방 배관이 들어간 집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몇 주 사이에 억 단위로 뛰는 집에 도무지 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러다가도 정말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하는 형님들을 보면 그 일상의 거룩함을 보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그림자를 버렸단다/사람들은 아빠 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폼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고/너희들이 달아 준 이름/아빠를 달고 세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단다/그 순간만은 아빠라는 이름이 훈장이 되고/슈퍼맨의 망토가 된단다//다음은 지갑을 닫았단다/멋진 폼으로 친구들 앞에서/지갑을 열었던 날이 있었지/네가 태어났던 날이야/그날을 끝으로/먼저 지갑을 꺼내 본 적이 없단다//망설이다 망설이다, 버린 것이 자존심이야/너무나 버리기가 힘들어/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았지/네가 학교에 입학하고/책가방이 무거워져 갈 때/오랜 세월 자리를 잡아/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그 자존심/잘 마시지 못한 소주 꾸역꾸역 삼키며/세상 밖으로 토해냈단다//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다고 놀려도/남자의 옷을 벗고 다닌다고 말해도/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배알이 없다는 말로/심장에 비수를 꽂아도/나는 너희들이 아빠니까, 괜찮아/아빠니까 말이야_ 김희정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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