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의 충청역사유람- 96. 아산 김옥균의 묘
공주 광정리 출생… 스물한살 장원급제 후 호조참판까지 올라
개화사상 심취해 우정국 개원축하연회 기회로 정변 일으켜
청나라 조공관계 청산·신분제도 폐지 등 14개 개혁조치 선포
혁명 실패 후 10년 유랑하다 홍종우에 의해 살해… 시신도 효시

▲ 김옥균 선생 묘.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지민이의 식객 제공
▲ 김옥균

중국 상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여관에 묵고 있던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복도를 걸어오는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엇인가 예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들어선 사나이가 권총을 꺼내 김옥균의 머리를 향해 발사했다. 총알은 가슴을 뚫고 나갔다. 김옥균이 반사적으로 일어서려는데 또 한 발의 총알이 김옥균의 배를 관통했다. 그리고 김옥균은 숨을 거두었다.

1894년 3월 28일, 조선의 개혁가이자 풍운아 김옥균이 43세의 젊은 나이에 같은 동포인 홍종우에 의해 생을 마감한 것이다. 홍종우는 수구세력이 보낸 자객 이연직에 포섭되어 개화파로 위장, 김옥균에 접근했던 것.

청나라는 암살자 홍종우를 체포하고도 구속하지 않고, 그는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청나라 군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내졌다. 10년 만에 시신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김옥균은 한강 양화진 모래밭에서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선언되어 시신을 토막 내 전국 팔도에 보내 효시케 하고 그의 머리는 양화진에 3일 간 효수 되었다. 끔찍한 처형이었다.

암살범 홍종우는 처벌은커녕 고종임금의 총애를 받아 영화를 누리고….

김옥균과 교유하던 일본인들이 그의 머리카락과 입고 있던 옷을 수습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도쿄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일부는 도쿄 진정사라는 절에 모셨다. 그러다 한·일 합방직전에 대한제국은 김옥균을 '대역죄인'의 신분을 취소하고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러자 1914년 9월 11일 도쿄 외국인 묘역에 있던 김옥균의 모발을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야산에 이장하고 묘비를 세우는 등 제대로 묘역을 가꾸었다.

그리고 충남도는 기념물 1호로 지정했다.

김옥균이 태어난 곳은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비록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직선거리로는 묘지와 매우 가까운 거리다.

그가 태어난 광정리에도 표지판과 기념비를 세워 역사적 기록을 전하고 있다.

▲ 담너머로 본 김옥균 사당.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지민이의 식객 제공
▲ 담너머로 본 김옥균 사당. 충청남도 도민리포터 지민이의 식객 제공

물론 생가는 그가 '대역죄인'으로 판결 받으면서 완전 파괴되어 흔적조차 없앴는데 오래전 필자가 현장을 답사했을 때는 집터에 있던 감나무 한 그루만이 옛일을 품은 듯 서있었다.

그의 부인 유씨 역시 노비로 전락하여 이곳저곳 전전하다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이곳 김옥균의 묘에 합장했다.

김옥균은 스물한 살에 과거시험에 응시, 장원급제(수석합격)하면서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고 호조참판(지금의 기재부 차관)까지 이르렀으나 그 무렵 엘리트로 촉망받던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과 교류하면서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개화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시찰하고는 일본의 힘을 빌려 나라를 개화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마침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원 축하연회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일단 정변은 성공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한 조공관계를 청산,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백성의 평등, 환곡 폐지를 비롯한 세금제도 개혁, 탐관오리 엄벌 등 14개항의 개혁조치를 선포했다.

그러나 김옥균의 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진입과 민비의 저항, 일본의 소극적 지원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을 역사는 '갑신정변'이라 일컫는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 10년을 유랑하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을 만나러 상해로 갔는데 그곳에서 암살된 것이다.

그의 개혁은 철저한 준비가 부족했고, 주변 여건이 그를 외면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43세 젊은 나이에 개혁의 피가 끓어올랐지만 안타깝게도 때(時)가 따라주지 않은 것이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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