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영 천안쌍용고등학교장

오래전 우리 반 생일 축하 담당자였던 녀석은 학년말 학급문집을 발간하는 편집장이 됐고 편집후기에 20년 뒤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 아래에서 12시에 만나자고 적었다.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 제 작년이 그 20년이 되는 해였으나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나는 부끄럽게도 전화벨이 울리고서야 녀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린 적이 있었다. 한참 동안 각자의 20년 역사를 공유하고 난 후 헤어지려는 순간 녀석은 모든 아이를 물리치고 나와 둘이서만 사진을 찍자며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꺼내 들었다. 매일 한 장씩 그날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외롭고 힘들었던 외국생활 시절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시작했다고 했다.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작년에 귀국해 지금은 제법 맛난 식당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고 꼭 한번 오라고 했으니 이 코로나19가 얌전해지면 귀한 사람 모시고 가 볼 참이다.

이제 겨우 보름 남짓 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나도 그 일을 시작했다. 조금은 다르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라고 이름 붙인 점심이 그 첫 주인공인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 있을까 감탄하는 중이다. 그 비밀은 영양 선생님과 조리사님을 비롯한 급식실 가족들의 기쁨 가득한 표정에 있고, 이른 아침 나와 아이들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환한 미소의 선생님들, 나만 보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녀석에게 천천히 반복해서 말해주고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되물어주면 기뻐하며 큰 소리로 말하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녀석의 행복한 표정은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게 만든다.

하지만 어찌 이런 장면만 있을까, 학교와 아이들에 대한 애정으로 학교생활기록부에 대한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담아 조목조목 아쉬움을 전하던 운영위원장님, 조금 더 다양한 방법의 소통을 조심스럽게 제안하던 학부모회장님, 육아시간 사용을 안쓰럽게 말하던 선생님의 표정이 남기고 간 여운, 개교 기념으로 심은 왜향나무들, 현대건축의 남긴 숙제가 있기도 하다.

며칠 안 되는 기간에 내 방을 다섯 번이나 찾아온 두 분 선생님도 있다. 아이들을 위한 열정이 이 정도라면 아직은 방법이 좀 서툴러도 안 될 일이 있을까, 학생회장 공약을 가져와 한 시간 넘게 피력하고, 원격수업 기간 중이던 1학년 학생들까지 참석해 열띤 토의를 하던 학생회, 교장이란 명찰을 보고 대뜸 이런 것은 이렇게 바꿔주면 후배들을 위해서 더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담임선생님 칭찬까지 아끼지 않던 3학년 3반 학생들은 분명 교대와 사대 체육과에 합격할 것이다.

학교는 지금도 학교 구성원 각각이 주인공이 되는 구성원 수만큼의 356회분 드라마를 만드는 공작소이다. 그것이 지금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일이라고 되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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