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전배 천안예술의전당 관장

난센스 퀴즈 ‘밤이면 밤마다 새 아침이 속히 오길 고대합니다.’ 나는 누구? 해답은 면도날 회사 사장.

생물학적으로 신체의 털은 피부 보호와 호흡, 체온 유지, 혈액순환 도움, 외부 영향 조기전달, 중금속이나 유독물질 배출, 충격흡수 등 다양한 기능을 발휘한다. 입가에 난 털은 수(鬚). 뺨에 난 것은 염(髥), 귀밑 구레나룻은 빈이라 일컫는다.

이밖에 머리카락(毛髮), 눈썹(眉), 코털(鼻毛)이 있다. 아이들은 변성기가 오면 솜털은 굵어지고 코밑이 거뭇해지기 시작한다. 또래끼리는 면도 실습 성공담을 은밀히 공유하기도 한다. 아버지 등 너머로 면도를 배우기도 하지만 첫 경험이라는 시행착오를 하나둘씩 겪으면서 스스로 그렇게들 성장한다. 13세기 이전 외과의사 표시였다던 3색 간판. 동맥·정맥·붕대를 상징하는 원통이 쉼 없이 돌아가는 곳. 이발소 풍경은 어쩌면 몽연한 추억처럼 다가오곤 한다. 느릿한 걸음의 아저씨는 언제나 슬리퍼 차림이었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뜨뜻한 하얀 수건을 얼굴에 덮어준다. 벽에 못 박힌 긴 가죽 끈에 접이식 면도칼을 쓱쓱 문질러 날을 세운다. 거친 솔에 비누거품을 적셔 입만 피해 듬뿍 바른다. 노회한 면도사는 신중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아니다. 직업적으로 작업범위를 그리고 있다. 연약한 피부 위로 미끄러지는 예리한 칼날, 날카로운 날은 각도와 힘의 강도를 조절하며 신중하게 장애물을 섬멸해간다. 무사가 칼로 끊듯 명징하고 파릇하게 피니시를 한다. 가정에서 사용했던 예전 면도기는 양날 곡괭이 모양이었다. 본체 손잡이를 돌리면 덮개가 양쪽으로 열리는데 가운데 날을 꽂아 쓴다. 낭창낭창한 날로 인해 추억의 조각은 항상 아슬아슬했다. 요즘은 5중·6중·7중 카트리지 면도날이 대세다. 전보다는 덜 위험하고 피부에 상흔을 그다지 남기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여 현대 면도 의식은 대개 혼자 치른다. 거울을 대하고 면도거품을 손에 받아 얼굴에 고르게 편다. 제례에 비기면 ‘초헌’인 셈이다. 물로 헹군 면도기를 부드럽게 얼굴 피부에 댄다. 입 안에 바람을 넣어 볼록하게 부풀린다. 면도 방향은 자기 스타일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밀거나 수염의 뿌리까지 제거할 듯 위로 치켜올리기도 한다. 대개 평지는 무난하나 코밑이나 턱 언덕은 난코스가 아닐 수 없다. ‘종헌’ 단계에선 손가락을 모아 마감면의 매끄러움 여부를 최종 확인한다. 미진하면 뒷손이 더 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주름잡는 G사, S사, D사는 면도기 분야 글로벌 기업이다. 전 지구적으로 또 다른 새벽이 오기만 열렬히 앙망하는 조직이다. 날이 두루 널리 빈번히 사용돼 하루빨리 마모되길 바라는 그룹이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새날로 갈아 끼우라는 마법 같은 주문을 거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중 본의 아니게 브랜드명 때문에 오해를 받아온 회사가 있다.

국내 면도기의 대명사 D사는 단연코 일본 기업이 아니다. 동양경금속의 앞 영문 DO와 면도기(Razor)의 R, COmpany의 CO 조합이 회사명이다. 1955년 설립된 순수 토종 대한민국 장수기업이다. 한때 호기심에 전기면도기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 광고에 등장하는 외국인 모델처럼 다듬어야 할 정도로 밀도가 무성하지 않았고, 3구 드릴 같은 진동 소리를 참을 정도의 인내심도 없었는데 말이다. 사용하고 나서는 어떤 개운함도 느끼지 못했고 얼마 쓰다가 깨끗이 씻어 놓았던 기억이 있다. 꽤 값나가던 전기면도기는 나의 관심 소홀로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요즘은 제조사가 다른 면도기 두 개를 번갈아 쓴다. 손에 쥐는 느낌도 다르고 얼굴에 닿는 감촉에도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 이발소 면도만큼 청량하진 않지만, 오늘도 새로운 날과 날을 맞이하고 마주하며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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