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 시인·문학박사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의 끝자락에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폭우로 산사태가 나고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겼던 8월의 기억들이 오롯이 매미 소리와 뒤엉킨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연례행사가 돼버린 집중호우와 폭염은 코로나19와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듯 우리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지구온난화가 계속될수록 이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이며 지구의 생물들이 대부분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변화가 서서히 진행되느냐 아니면 급속히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그 피해 정도를 예측할 수 있는데 요즘 벌어지는 자연 현상들을 보면 암울한 미래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2020년의 폭우는 나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던 유년의 추억 속에 들어와 슬픈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라졌다. 코로나와 폭우로 어수선한 하루하루가 지나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연락이 뜸했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전화 내용은 폭우로 인해 친했던 친구가 세상을 등졌다는 내용이었다. 시골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나와 둘도 없이 막역한 사이였다. 친구는 결혼을 늦게 한 탓에 아들이 아직 13살밖에 되지 않는다며 걱정을 했고 최근엔 근처에 혼자 사는 칠순 노모를 도와 포도밭 관리에 분주하다고 했었다.

낮은 산 밑에서 조그마한 포도밭을 경작하는 친정엄마를 도와주던 친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내게 전화를 걸어 포도를 팔곤 했다. 친구는 ‘모양이 이상해도 맛은 최고야’라며 언제나 주문량보다 더 많은 포도를 집으로 보내주곤 했었다. 장례식장에 모인 어르신 중에는 평생 멀쩡하던 산이 갑자기 무너져 두 모녀가 변을 당했다며 환경오염으로 드디어 하늘이 미친 것 같다고 한탄을 하셨다. 친구와 함께했던 유년의 추억들이 어둠 속으로 잠적해 버리는 것 같았다.

유년의 시간 속에 자리했던 친구와의 추억 중에는 어두운 밤의 딸기 서리와 장마로 둥둥 떠내려가던 수박을 줍던 일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몰래 딸기를 한 움큼 쥐고 바라본 달빛은 어찌 그리도 휘영청 밝던지 온몸에 오금이 저려 왔다. 수박밭의 수박들은 장마가 올 때쯤이면 대부분 주인 들은 사라지고 주인 잃은 수박들만 장맛비에 동동 떠다녔다. 다 팔고 남은 볼품없고 쓸모없는 수박들이었지만 그래도 그중엔 쓸만한 것도 있어 친구와 함께 나는 맛있게 수박을 잘라 먹었었다. 좋은 수박을 하나라도 더 찾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닥치는 데로 수박을 반으로 잘랐는데 그때마다 드러났던 수박의 하얀 속살은 지금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사라고 하지만 자연재해로 이런 슬픈 일이 내게 생겼다는 사실이 무척 낯설고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9호 태풍 마이삭이 세상을 삼킬 듯이 윙윙거리고 있다. 유리창으로 느껴지는 거센 빗줄기와 천둥소리를 긴 호흡으로 쓸어 내려본다. 굵은 빗줄기는 마치 힘차게 휘두르는 채찍처럼 유리창을 때리며 자연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마치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에 경고를 보내는 듯하다.

‘지구환경보고서’에는 지구의 환경오염이 일반의 인식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음을 각종 통계 자료를 통해 경고하고 있다.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죽은 자의 이야기가 들리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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