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공섭 대전 동구문화원장

지리산은 천혜(天惠)를 입은 명산으로 그 산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진리가 숨어있으며 자연의 큰 울림이 인간을 훈육하는 어머니의 품 같으면서 아버지의 엄숙함을 함께 지닌 영험한 산이라고 한다.

지리산은 한마디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지엄하고 엄숙하고 포근한 산이라고 한다. 지리산(智異山)을 풀어보면 ‘지혜로운 이인의 산’이며 금강산·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으로 민족의 영산이라 일컫는다.

지리산의 큰 품에 안긴 1500m가 넘는 20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천하의 명산이며 가장 높은 천왕봉(1915m)과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등 세 봉우리가 중심을 이루고 지리산 품속에는 칠선계곡과 한산계곡, 대원사계곡, 피아골, 뱀사골이 자리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름표를 달지 못한 봉우리나 계곡이 많은 산이라고 한다.

지리산은 절친한 친구(親舊)의 인생을 반전시킨 곳으로 지리산과 인연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친구의 사업실패로 인생을 정리하려 찾아간 지리산, 그 절망의 순간에 천 길 낭떠러지에서 꼭 잡고 끄러 올려준 지리산, 그래서 여기 지리산의 신비한 형통(亨通)에 마음까지 숙연해진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명 사찰(名寺刹) 화엄사(華嚴寺)를 향하면서 진한 솔향이 우리의 발길을 사찰 안으로 안내한다. 계곡에서 흐르는 청정수가 토해내는 화엄(華嚴)의 경전처럼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닦아 덕과(德果)를 연주하면 화엄사 경내는 천상의 보료를 펼쳐 중생을 품에 안는다. 경내에는 그 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국보와 보물 들이 가장 많은 사찰로 유명하지만 필자의 눈길을 끄는 공덕비 앞에 발이 머물렀다. 그것은 화엄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위기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깊이 이해한 한 경찰관에 의해 지금 화엄사를 지켜낸 것이다.

6.25 전쟁 중 지리산에 은거한 빨치산 토벌대장인 차일혁 경무관에게 명령이 내려왔다. 그것은 빨치산이 은신을 할 수 없게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차일혁 경무관은 문짝만 떼어내 절 가운데에 놓고 태워서 명령도 지키고 화엄사도 지켜냈다.

차일혁 경무관의 문화재 사랑으로 전라도에 있는 명 사찰 천운사, 백양사, 쌍계사, 선운사 등을 전란(戰亂)에도 온전하게 지켜내게 됐다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며 그분의 문화재 사랑은 현세대의 우리를 크게 훈육하고 있다. 화엄사는 문화재로서 중요한 건축물들로 이들은 모두 신라 시대에 창건했는데 거의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돼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깨달은 황제가 산다는 뜻의 각황전(국보 제67호)이다. 조선 중후기인 숙종 때 지어진 건물이지만 숭유억불의 기조 속에서도 임금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 다음 큰 규모로 지어진 법당이다.

본래 장육전이라는 건물이 소실된 곳에 복원하면서 숙종 임금이 현판을 ‘각황전’이라 사액해서 각황전으로 부른다. 각황전 앞에는 그 규모에 걸맞은 거대한 석등(국보 제12호)이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높이가 무려 6.4미터, 직경이 2.8미터에 달한다.

각황전 왼쪽 뒤로 돌아가면 탑전이 나오는데 이곳에 세워진 화엄사 사자삼층석탑(국보제35호)은 이형탑 가운데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가장 완성도가 높은 탑의 예술품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화엄사에 소장돼 있는 영산회괘불탱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됐으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과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 대웅전(보물 제299호),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 300호),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 서오층 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1348호), 대웅전 삼신불탱(보물 제1363호),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보물 제1548호) 등이 있다. 화엄사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와 부용영관 선사가 이 매화나무를 보고 시를 읊었다 해서 일명 부용매로 불리는 화엄사 매화나무(천연기념물 제485호)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화엄사 경내를 답사하면서 천 년 의향을 호흡하며 타임 캡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옛 정취를 마음 가득 호흡한 시간이었다. 경내에 있는 사찰의 건축물은 단청을 하지 않은 아주 오랜 세월을 보듬은 따뜻한 절집의 훈훈함이 묻어있었다. 단청은 애초에 안 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단청 칠을 했다면 화려함이 넘쳐서 우직하고 소박한 지금의 모습은 보지 못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화엄사를 산책하면서 누린 호사는 두고두고 긴 감동으로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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