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철 세종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장

[충청투데이]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존엄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서양에서 기원한 이러한 자각은 중세 신(神)중심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기원한 것임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14~16세기 서양 사회는 르네상스(인문주의 운동)를 거치며 ‘천부인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인간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로 그 누구도, 국가조차도 이러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는 19세기 들어 이른바 자유주의 사상(Liberalism)으로 전개되었다. 개인의 선택과 판단이 모든 사회적 합의의 기초이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자유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선택과 판단이 모든 사적 거래의 원리이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자유주의는 ‘시장경제’로 나타났다. ‘시민’은 바로 민주주의와 시장의 주체로서의 개인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국가 통치체제의 운영원칙일 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의 사회질서와 개인들의 생활문화를 가장 온당하게 규제하는 규범으로 확장되었다. 지구적 차원에서 ‘위험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주체는 ‘민주시민’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주체 역시 ‘민주시민’이며, 사회적 차원에서 사회적 갈등과 이해를 조정하는 주체 역시 ‘민주시민’일 수밖에 없다. 지역적 차원에서 시민 생활의 질을 높이는 문제 역시 ‘민주시민’의 선택과 판단에 달린 문제이다.

인간존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민주시민 의식은 서양에서 기원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동양 전통에서는 인류보편적 인간상이 제시된 적은 없는가. 한반도에서 기원한 단군사상을 비롯해 4세기 전후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와 유교의 인간관은 서양 근대의 인간존엄 사상과 배치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로마 인문주의든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 사상은 예외없이 인간존엄을 천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존엄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이다. 서양 근대 천부인권론의 개인은 ‘원자적 개인(元子的 個人)”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종 ‘개인주의’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동양 유교 사상의 개인은 ‘관계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종 ‘정실주의(情實主義)의 온상’으로 비판받아 왔다. 가치중립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지나치게 옹호하게 되면 개인주의 내지 이기주의로 나타나게 되며, 공동선(共同善)과 사회통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개성과 다양성이 위축될 수밖에 없음은 역사를 통해서 학습한 바 있다.

현행 초·중등교육과정 총론의 ‘추구하는 인간상’에는 ‘홍익인간’과 ‘민주시민’이 언급되어 있다. 최근 세종시교육청을 비롯한 시·도교육청은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학교교육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민주시민교육의 목적은 모든 학생들이 스스로 인간존엄에 대한 자각을 넘어 타인의 존엄성에 공감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경계하며 동시에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치, 경제, 사회 원리와 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높이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 정도의 민주적 체제를 이루기까지 어떤 어려운 과정을 겪어왔는지 돌아보며 더 성숙한 민주적 체제를 위해서 어떠한 실천이 필요한지를 학생들의 생각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볼 때, 인간존엄을 훼손하는 일은 끊임없이 발생했으며 이에 맞서 인간존엄을 확보하기 위한 희생과 고통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인간존엄을 확보하기 위한 민주주의 학습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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