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초려문화재단 이사장

초려선생(1607~1684)은 사계선생의 고제3현(高弟三賢)으로 북벌(北伐)을 도모하던 효종으로부터 북벌밀지를 받았던 산림5신(山林五臣)이며, 현종 15여 년 간 선비로선 최고의 예우를 받았던 충청5현(忠淸五賢) 가운데 한 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부터 초려선생에 대한 평가와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요즘의 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효종 제위 10년이 되는 1659년 두 번째 밀지를 받고 상경하여 북벌의 당위성을 논하고 시국을 정확히 진단 어떻게, 왜, 누가해야 하는지를 묻고 4.3만여 자에 이르는 대상소문을 제진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해봉사(己亥封事)와 향약(鄕約)이다.

80여년 앞선 율곡(栗谷)의 만언봉사(萬言封事)보다 더 현실의 문제를 파악하여 모든 문제는 실천이 없는 데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하고 실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초려(草廬)는 당시의 국정을 진실한 노력(實功)이 결여되어 진실한 효과(實效)를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진단했다.

구체적으로 윗사람은 다스림을 구하는 실공이 없으며, 아랫사람 또한 업무에 책임을 지는 실공이 없고, 경연(經筵)도 도(道)를 강론하는 실공이 없으며, 학교 역시 선비를 배양하는 실공이 없고, 국가의 모든 정책은 백성을 구제하는 실공이 없으며, 사람들의 마음도 선(善)을 행하는 실공이 없으며, 조정 또한 가르치고 명령하는 참된 실공이 없음을 지적했다.

이는 설폐론(設弊論)에서 지적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구체적 방책을 제시한 것으로 국정 전반에 대한 포괄적 개혁안으로서 정풍속(正風俗), 양인재(養人材), 혁구폐(革舊弊) 등 3개 강목과 16조목을 설정하여 국정혁신 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승정원일기 현종 편엔 도승지가 대독하고 초려가 설명하는 자리엔 현종은 점심도 거른 채 눈물을 흘리며 옳다! 옳다! 바로, 시행 하라!고 의정부에 지시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200여년 초려의 기해봉사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논쟁만 하다가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을 맞았고 나라는 다시 외세에 의해 풍전등화의 길로 치닫다가 결국, 일제의 치하를 맞게 되었다.

초려의 개혁안은 신분제도와 상관없이 국가적 차원의 인재의 발굴과 등용으로 국가발전의 초석을 다지는데 있었다. 그리고 성인(聖人)의 법도 때가 지나고 바뀌면 고쳐야 하는데 이제까지 300년 동안 누적된 적폐로 국정이 모두 실질이 없는 상황이니 지금, 당장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일갈했다.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대안까지 제시하여 건국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 부국강병을 위해 상하는 물론,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힘을 합쳐 조선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고자 했던 선비의 노력이 오늘의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데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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