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날씨도 바이러스도 볕들 날 없는 요즘이다. 일상에 일부러라도 햇살을 비추지 않으면 우울한 날은 이어지리라. 선인이 동토에 핀 매화를 보고자 남쪽을 향하여 나귀를 타고 떠났듯, 우리도 장맛비를 불사하고 보물을 보고자 길을 떠난다. 박물관에 '새 보물이 납시었는데' 알현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만 같아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문화재청과 함께 특별전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를 개최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지친 국민에게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특별전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역사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기록과 선인의 예술혼이 담긴 서화, 종교적 염원이 담긴 불교문화재 등 83건 196점을 선보인다. 안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다. 한 번의 관람으로는 제대로 감흥을 누릴 수 없는 명작들이다. 특별전의 작품들은 여러 기관과 소장품을 한 자리에 전시한 것이라 다시 볼 수 없는 작품도 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문화유산을 바라보느니 보고 싶었던 작품을 오래 감상하자는 생각이다.

특별전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이인문(1745년~1821년)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보물 제2029호)이다. 사전에 자료를 통하여 보고 싶었던 작품은 뒷전이고, 이인문의 서화가 나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8.5m 두루마리 형태의 산수화 대작이다.

그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김홍도와 나란히 궁중화원으로 이름을 떨친 화사다. 이인문은 38년 동안 차비대령화원을 지냈고, 세 차례 연행(燕行)을 다녀왔으며 ‘최고 수준의 기량을 발휘하여 산수, 인물, 화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도록은 적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다른 의식과 새로운 필법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 이인문은 동갑내기인 김홍도처럼 대우를 받지 못한 느낌이다. 심사정의 마지막 작품인 ‘촉잔도권’(보물 제1986호)와 비슷한 그림인 ‘강산무진도’가 2019년에 뒤늦게 보물로 지정된 것만 봐도 그렇다.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를 적게 그렸고, 이상향을 표현한 산수화나 중국 고사를 그린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는 평이다.

‘강산무진도’를 톺아보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자연과 활기차게 움직이는 인간의 군상이 보인다. 산수화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기암절벽에 별장을 세우고 신선처럼 은둔한 선비며, 절벽 꼭대기에서 도르래를 내려 물건을 끌어올리는 사람에, 험난한 협곡을 오르느라 헉헉거리는 인간과 나귀의 모습과 강변 포구에 사람들의 활동 등 360여 명 인간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고 있다. 산수화는 자연에서 아귀다툼 없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길 원하는 이인문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남산이 보이는 층계에 앉아 비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순간 어린아이가 빗속을 뛰어 들어간다. 더불어 환호하며 비 맞는 쾌락을 즐긴다. 자연인이 따로 없다. 산수화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하루를 보내니 인간사에 지친 복잡한 머릿속이 절로 비워지는 듯하다. 선인의 흔적이 소중한 유산으로 남았듯, 우리의 흔적도 유산으로 남을 것이니 생(生)을 빛나도록 잘 가꿔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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