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6·25와 대전방송국
이승만 대통령 극비리에 대전 피난
KBS대전방송국 책임자에 방송 지시
"아군은 이미 의정부 탈환했습니다"
안심하라는 메세지 전국으로 송출
피난 짐 싸던 시민들 발걸음 되돌려
대전방송국, 임시중앙방송국 업무수행
천안까지 적 수중 들어가자 정부 철수
옮길 수 없는 자재는 파괴한 후 떠나

▲ 대전시 중구청 자리로 옮겼던 시기의 대전방송국.
▲ 6·25때 이승만대통령의 방송을 주선했던 유병은 당시 방송과장.
▲ 6·25때 이승만대통령의 방송을 주선했던 유병은 당시 방송과장.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사실은 아침 7시 뉴스를 타고 대전시민들에게 알려 졌다.

그러나 3·8선에서의 남·북 군사충돌은 자주 있었던 터라 시민들은 한 동안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하여 휴가 중이거나 외출중인 군인들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되풀이 되면서 상황의 심각성이 더해 졌다.

이런 가운데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극비리에 대전으로 피난을 내려와 대흥동 충남도지사 관사에 짐을 풀었다.

그 날 밤 KBS 대전방송국에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 김장흥이 나타나 방송국 책임자를 찾았다. 당시 대전방송국장은 이범구 였는데 발령 받은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고, 주말에 서울로 올라가 부재중이어서 유병은(兪炳殷) 방송과장이 경호실장을 맞았다. 유병은 과장은 구한말 개화사상가이며 정치가였던 유길준 선생의 손자였다.

김장흥 경호실장은 권총을 빼들고 무조건 자기를 따라 오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따라간 곳이 충남도지사 관사.

관사 거실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치스카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유과장의 신분을 확인한 후 오늘 밤 9시, 자신의 방에서 방송을 하도록 조치하고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연결하여 전국에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이 모든 절차를 절대 비밀로 할 것도 강조했다.

이리하여 목동에 있는 대전방송국 직원이 방송장비를 지게꾼을 사서 지사 관사로 가져와야했다. 당시 방송국에는 차량이 없었던 것이다. 기자재를 가져 오는 동안 이 대통령은 방송 원고를 직접 작성했다.

마침내 밤 9시가 되자 이 대통령은 마이크 앞에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대통령 이승만입니다"로 시작한 방송은 "서울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 아군은 서울을 사수할 것입니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 하십시오"로 끝을 맺었다. 내용이 매우 간단했으나 의정부를 탈환했고, 서울을 사수할 테니 안심하라는 대통령 메시지가 분명하여 서울 시민들은 피난 짐을 싸서 남쪽으로 떠나려던 발걸음을 되돌렸고 곧이어 한강철교가 끊겼기 때문에 시민들의 희생이 컸다는 비난을 받았다. 물론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대통령은 대전에서 방송을 했으면서도 서울에서 한 것처럼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어쩌면 이와같은 ‘방송 해프닝’은 이 대통령이 측근 참모들의 부실한 정보보고에 의한 오판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 대전방송국이 HLKI호출부호로 새 출발하면서 진행한 기념식.
▲ 대전방송국이 HLKI호출부호로 새 출발하면서 진행한 기념식.

유병은 방송과장은 KBS가 방송공사로 전환되면서 1973년 3월1일부터 1974년 2월28일 까지 KBS 대전방송국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2003년 서울 반포동에 거주하던 유병은옹을 방문하여 이와 같은 증언을 들을 수 있었는데 80대 후반의 연세에도 6·25때 겪었던 대전방송 이야기를 할 때는 목소리를 높였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하여 대전방송국은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5일 까지 만 18일 동안 임시중앙방송국이 되어 전시 하에서의 숨 가쁜 업무를 수행했다. 겨우 130평 좁은 방송국은 중앙방송국 직원까지 합류하는 바람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군의 남침은 더욱 가열되어 7월8일에는 천안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금강을 위협하면서 대포소리가 대전 시내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러자 7월15일 정부는 대전에서 철수, 대구로 남하했으며 대전방송국에 있던 중앙방송도 철수를 해야만 했다.

중요한 시설 자재는 트럭에 옮겨 싣고 옮길 수 없는 것은 북한군이 방송을 못하도록 파괴한 후 피란길에 나섰다. 그래서 다시 수복되었을 때 바로 방송을 못하고 그해 12월에야 출력 500W로 전파를 발사할 수 있었다.

참으로 KBS 대전방송국은 현대사의 아픔과 기쁨을 절절히 간직한 기념비라 하겠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참고: 유병은 저 '방송야사' KBS 대전총국 6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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