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8·15 해방과 대전방송국
단층 기와집서 직원 14명으로 출발
1943년 7월15일 첫방송 전파발사
시민들의 유일한 뉴스정보원 역할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정각
잡음 가득한 일왕 항복선언 송출
시내 곳곳서 시민들 만세 부르며
모르는 사람끼리 얼싸안기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학도대 단체
서울 중앙방송국 경비서겠다 떼써

▲ 첫 전파를 발사한 KBS 대전방송국 목동사옥 정문.
▲ 첫 전파를 발사한 KBS 대전방송국 목동사옥 정문.

일본과 미국의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절정이던 1943년 7월15일 대전에서 첫 방송의 전파가 발사 되었다.

호출부호는 일본 방송국에 부여 되는 JBIK, 주파수 880KHZ, 출력은 50W.

출력이 50W로 작았던 것은 미군 폭격기가 전파 감지를 통해 도시의 위치식별을 못하게 한다는 취지였다.

방송은 일본어로만 했고 이름만 대전방송국이지 경성방송국(서울 중앙방송) 중계가 거의 전부였고 대전에서 하는 것은 충남도청이나 경찰의 공지사항 전달이 대부분 이었다.

지금의 대전방송국 호출부호 HLKI가 된 것은 해방이 되고서 1947년 9월3일 미군정하에서였다.

방송국 위치는 중구 목동 15-3. 당시는 이곳이 숲이 우거진 야산이었고 대지 6600평에 건평은 겨우 130평의 단층 기와집이었으며 직원은 모두 14명으로 단촐 하게 출발했다.

첫 전파를 발사한 것은 1943년이지만 대전방송국으로 간판을 건 것은 1년 전인 1942년 7월15일 인데 이미 1940년부터 일제하 방송국을 관리하던 조선방송협회 대전 출장소가 개설돼 강경, 청주, 충주, 공주에 기술원을 파견하는 등 충남·북 방송업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방송내용은 거의가 태평양 전쟁의 전황보도로 일본이 필리핀의 미군과 싸워 이겼다던 지 싱가포르를 점령했다는 등의 뉴스가 주를 이루었으며 일본군이 패했다는 뉴스는 한 줄도 없었다.

그때는 TV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시민들은 대전방송국에서 방송되는 각종 뉴스가 유일한 정보원이었다.

▲ 대전시 중구청 자리로 옮겼던 시기의 대전방송국.
▲ 대전 갑천변에 우뚝 자리잡은 KBS 대전방송국.

뉴스 문장은 "~했다" "할 것이다" 등 직설법이었으며 지금처럼 "~했습니다" "~할 것 같습니다"의 구어체(口語體) 로 바뀐 것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부터였고 이 때부터 뉴스 끝에 보도 기자의 실명을 밝혔다. 그만큼 뉴스의 신뢰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KBS 대전방송국의 가장 감동적인 뉴스는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정각에 행해진 히로히또 일왕(日王)의 항복선언 이었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저 여기 충량(忠良)한 신민에게 고하노라"로 시작된 일왕의 방송은 몹시 침통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방송 음질마저 잡음이 많아 일부 지역에서는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무조건 항복한다는 것이 골자인데 사족이 많아 자칫 방송 핵심을 흐리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방송이 나가자 대전시내 곳곳에서 만세를 부르는 등 시민들의 감동적인 모습이 목격되었다. 모르는 사람끼리 얼싸 안기도 하고 그냥 거리에서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처 방송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벽보를 써 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전을 비롯 공주, 천안 등 충청남도 시·군은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여전히 치안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의 기쁨을 표현하는 데는 제한적 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닥친 문제는 좌익세력들의 끈질긴 방송 장악 음모.

맨 먼저 나타난 것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학도대'라는 이름의 좌익단체로 이들은 8월 16일 서울 중앙방송국에 나타나 목총을 들고 방송국 경비에 나서겠다고 떼를 썼다. 말이 방송국 경비지 속셈은 방송국 장악이었다.

그러나 방송국 직원들이 이들에 맞서 방송국을 지켜 냈으며 9월 9일 미국이 서울에 진주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좌익들은 끈질기게 방송장악을 위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계속)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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