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안면도 방폐장 반대시위]
정부, 주민들과 대화·설득 없이 추진
군중 1만8000명 모여 반대시위 나서
경찰과 대치 격화… 주민대표7명 구속
원자력연구소 박사 2명 안면도 파견
투쟁위원장 설득하려 막소주 사발 원샷
정부 방폐장 설치 취소로 평화 되찾아

▲ 1990년 11월 7일 안면도 방사성폐기물처분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안면도 주민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본사 DB

아름답고 평화로운 안면도에 사나운 폭풍이 불어 왔다.

1990년 11월 8일 아침부터 안면도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방폐장 결사반대'의 머리띠를 두른 주민들이 섬 이곳저곳에서 모여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들은 기다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정오가 되자 1만8000명이나 되는 군중이 안면도 모든 길을 가득 메웠다. 그러니까 집집마다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다 나온 것이다.

학교들은 방폐장(방사성물질폐기장) 설치에 반대하는 뜻으로 학부모들이 등교거부를 며칠째 계속하는 바람에 텅 비어 있었다.

주민들의 집단행동이 점점 확대되자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속속 안면도로 집결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주민들을 자극했다.

모든 시위가 그러 하듯 경찰은 시위대의 행진을 막으려 했고 이에 밀리지 않으려는 시위대와 몸싸움이 전개 되었다. 양쪽 모두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안면 지서가 불에 타고 경찰차가 파손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의 피해도 컸다. 더욱이 시위를 이끈 주민대표 7명이 구속된 것. 왜 이런 불상사가 벌어 졌을까?

우리의 원자력 발전이 본격화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원전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쌓여 가는 데 이를 처리할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부와 원전 측이 폐기장 후보지를 극비리에 물색했는데 충남 안면도가 낙점된 것. 하지만 워낙 비공개로 추진하다 보니 주민들과의 대화와 설득과정이 없었고 뒤늦게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주민들은 물론 반핵 단체까지 가세함으로써 전국적인 이슈로 커졌다. 비공개로 추진하는 국책사업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큰 부작용을 가져 오는가를 보여 준 사례라 하겠다.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할 때 원자력 연구소의 박사 두 명이 안면도에 파견됐다.

연구원의 A박사와 B박사가 안면도 방폐물 반대투쟁위원장을 설득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투쟁위원장이 소유하고 있는 가두리 양식장으로 갔다. 마침 그곳에 투쟁위원장이 있었다.

이들 박사들이 자기들을 소개하자마자 투쟁위원장은 '당신들 여기가 어디라고 왔냐?'며 소리쳤다. 그리고 아예 말상대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방폐장의 안전성을 설득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큰 사발 세 개에 막소주를 가득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것을 마시면 대화를 하겠다는 것 아닌가. 투쟁위원장이 먼저 막소주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 켰다.

그러자 결심한 듯 A박사가 따라 주는 막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B박사도 뒤따라 그렇게 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인데 대화를 하겠다는 사명감에서 그 독한 막소주를 들이킨 것이다. 그래서 투쟁위원장과 박사들 사이에 막 대화가 시작되고 다시 만나자는데 까지 이르렀는데 사고가 터졌다. 어항으로 돌아오는데 술이 약한 A박사가 정신을 잃고 바다에 빠진 것이다. 바다에 빠진 A박사는 허우적거리며 곧 죽기라도 할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투쟁위원장이 잽싸게 바다에 뛰어 들어 그를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A박사는 정신을 잃고 있었고 투쟁위원장은 그를 인근 이장네 집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하여 살려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투쟁위원회 청년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험한 분위기가 벌어 졌는데 이 역시 투쟁위원장의 설득으로 청년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정부는 방폐장 안면도 설치를 취소했고 안면도에는 이름 그대로 평화가 찾아 왔다.

<충남복지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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