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책장(冊張)의 침자리가 동서양이 같단다. 나라마다 책의 크기나 모양, 글씨를 쓰는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지점에서 하나가 된 것처럼 정(精)이 흐른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속도는 달라도 침자리에선 쉼표처럼 한 호흡을 했으리라. 예전에는 종이의 질도 좋지 않았고 책장에 꽂은 소품도 흔하지 않았다. 책이 귀하여 한 권의 책을 여러 사람이 돌려보았으리라. 책에 메모나 장서인을 남기지 않으면, 그 책을 누가 소유하고 독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먼 훗날 책장의 타액은 독자의 이력으로 남으리라. 과학의 발전은 침을 분석하여 수백 년 전 독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책은 인류의 보고이자 기록 유산이다. 고전을 읽다가 '침자리'란 단어에 사로잡혀 선인의 생각 궤적을 따라간다. 동양의 책에는 침자리에 투명한 기름종이를 덧붙인 생활의 지혜도 번뜩인다. 책장을 넘기는 지점에 침이 잔뜩 묻어 헤어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선인들이 책을 얼마나 애지중지하였는지 알 수 있는 증거이다.

타인의 침을 더럽게만 볼 일이 아니다. 문사는 역시 예리하다. 일명 타액이 묻은 책장의 '침자리'를 의미화하여 유명해진 작가도 있다. 이탈리아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중세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특별한 책을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려고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자리에 독약을 묻힌다. 책을 몰래 읽은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다. 과연 침자리에 독약만 묻혀있었을까. 이 책의 공간인 거룩한 수도원은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과 암투의 장이다.

서재에 꽂힌 수많은 책이 나를 향한다. 책의 첫 장부터 읽다가 놓아버린 책도 있고, 두서없이 한 부분만 읽고 접어놓은 책도 있다. 책장의 모서리를 접으며 강아지의 귀로 표현한 시(詩)가 떠오른다. 마경덕 시인의 ‘책들의 귀’에서 "책의 귀는 삼각형, / 귀퉁이가 접히는 순간 책의 귀가 태어나네" "순순히 귀를 내주고/ 충견처럼 그 페이지를 지켰지만 해가 가도 / 끊어진 독서는 이어지지 않고 책의 심장에 먼지만 끼었네"라고 읊는다. 인생이란 '책의 귀'처럼 어느 한 페이지를 접어놓고, 수많은 갈등과 고민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무수하리라.

책장(冊張)의 침자리는 무량의 궤적을 품고 있다. 그 표면에는 저자가 수없이 숙고한 생각들이 활자로 적나라하다. 또한, 책장마다 독자의 무언의 언어가 침의 흔적으로 살아 있다. 그러니 책은 시공간을 초월한 혜안의 산물이다. 삶의 질주에서 잠깐 멈춰 여유로운 독서를 권한다. 책 속에서 예리한 통찰을 엿보고, 삶의 지혜를 만나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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